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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풍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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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태리(勿台里)

[매룬, 물태, 물태방리]【리】 본래 청풍군 읍내면(邑內面)의 지역으로서 수원이 좋아서 물이 많이 나므로, 매룬 또는 물태(勿台), 물태방리(勿台坊里)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물태리라 하여 제천군 비봉면(飛鳳面)에 편입되었다가, 1918년

다불리(多佛里)

[다불,다불미]【리】 본래 청풍군(淸風郡) 근남면(近南面)의 지역으로서, 다불(多佛), 다불미 또는 다불산리(多佛山里)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다불리라 하여 수산면에 편입됨. 1980년 4월 1일 제천시 시승격에 따라 제원군 수산면 다불리가 되었다가 1995년 1월 1일 시군통합으로 제천시 수산면 다불리가 됨. 괴실-재【고개】→ 다불릿재 다불(多佛)【마을】→ 다불리. 다불-미【마을】→ 다불리. 다불-재 [수산재]【고개】→ 다불에서 수산리로 가는 고개. 다불릿-재 [괴실째]【고개】 다불리에서 괴곡리로 가는 고개. 다불산-리(多佛山里)【마을】→ 다불리. 다불암【절】세동종으로 다불리 199번지에 소재(주지 김영태 법명 억석, 신도수15명) 독수리-봉【산】다불 동쪽에 있는 산. 산봉우리가 독수리처럼 생겼다 함. 두무-재【고개】두무산에서 수산으로 넘어가는 고개. 두무-터【골】두무산 위쪽에 있는 골짜기. 리도【길】213호선(다불리-전곡리) 상-리(上里)【마을】→ 웃말. 수산-재【고개】→ 다불재. 아랫-말 [하리]【마을】다불 아래쪽에 있는 마을. 웃-말 [상리]【마을】 다불 위쪽에 있는 마을. 촛대-봉【산】두무산 북쪽에 있는 산.봉우리가 촛대처럼 뾰죽함. 하-리(下里)【마을】→ 아랫말. 형제-바우【바위】 상리 동쪽에 있는 바위. 크고 작은 바위가 형제처럼 나란히 서 있음. 형제바우-산【산】→ 형제바위가 있는 산

청풍면(淸風面)

【면】제천시 행정 구역 1읍 7면 9동의 하나. 본래 청풍군(淸風郡, 淸風縣) 의 소재지로서, 읍내면(邑內面)이라 하여 상리(上里), 중리(中里), 하리(下里), 물태(勿台), 도촌(道村), 실리곡(實利谷), 연리(淵里), 광의(廣儀), 계산(鷄山)의 9개 동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근서면(近西面)의 전부 곧 신촌(新村), 단촌(丹村), 연론(連論), 양평(陽坪), 도곡(陶), 대류수(大柳水), 용복(龍伏), 진곡(眞谷), 고명(高明)의 9개 동리를 병합하여 비봉산(飛鳳山)의 이름을 따서 비봉면(飛鳳面)이라 해서 제천군에 편입되어 읍리(邑里), 물태(勿台), 도리(道里), 실리곡(實利谷) 연리(淵里), 광의(廣儀), 계산(鷄山), 신리(新里), 단리(丹里), 고명(高明),연론(連論), 양평(陽坪), 도곡(陶), 대류수(大柳水), 용곡(龍谷)의 15개리로 개편 관할하였는데, 1917년 옛 청풍(淸風) 고을의 이름을 따서 다시 청풍면으로 고치고, 1929년 10월 14일 제천군 수하면(水下面)의 후산(後山), 장선(長善), 사오(査五), 부산(婦山), 황석(黃石), 단돈(丹頓), 오산(伍山), 방흥(芳興), 진목(眞木)의 9개리를 편입하여 24개 리로 되었다가, 1947년 1월 31일 금성면(錦城面)의 학현(鶴峴), 북진(北津), 교리(校里)와 수산면(水山面)의 도화리(道花里)를 편입함과 동시에 고명리를 수산면으로 넘겨 주고 27개 리를 관할함. 1980년 4월 1일 제천시 시승격에 따라 제원군 청풍면이 되었다가 1985년 충주댐 공사로 8개리가 수몰되고 19개리가 남게 되었으며 1995년 1월 1일 시군 통합으로 제천시 청풍면이 되었다.

계산리(鷄山里)

[계장골, 계장곡, 제장골, 계산동리]【리】 본래 청풍군(淸風郡) 읍내면(邑內面)의 지역으로서, 닭의 형국으로 되었다는 비봉산(飛鳳山)의 밑이 되므로 계장골, 계장곡(鷄場谷), 제장골 또는 계산동리(鷄山洞里)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계산리라 하여 제천군 비봉면(飛鳳面)에 편입되었다가, 1918년

광의리(廣儀里)

[광의동, 광의동리]【리】 본래 청풍군(淸風郡) 읍내면(邑內面)의 지역으로서, 지형이 편편하고 넓으므로 광의동리(廣儀洞里)라 하였는데, 강아동과 솔무정 두 마을로 이루어졌는데 솔무정에 40여호 강아동에 20여호가 살고 있었다.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광의리라 하여 제천군 비봉면(飛鳳面)에 편입되었다가, 1918년 청풍면에 편입됨. 1980년 제천시 시승격에 따라 제원군 청풍면 광의리가 되었다가, 1985년 충주댐 공사로 인하여 수몰마을이 되어 50여호가 타지로 이주하고 10여 가구가 신조성 마을에 옮겨 살고 있으며, 1995년 1월 1일 시군통합에 따라 제천시 청풍면 광의리가 되었다. 강아동【마을】솔무정에서 비봉산 쪽으로 개빼기 저 너머에 위치한 마을. 광의-동(廣儀洞)【마을】→ 광의리. 광의동리(廣儀洞里)【마을】→ 광의리. 느티나무【고목】강아동 입구에 수령 300년 정도의 느티나무가 있었으며, 나무아래 당집이 있었고 음력 정월 초사흘에 동네 고사를 지냈음. 봉정사【절】신도 800여명으로 청풍 면내 유일의 불교사찰. 솔무-정¹[송정, 송무정]【마을】 광의동 동북쪽에 있는 마을. 전에 소나무가 울창하였음. 솔무-정²【숲】 솔무정에 있던 소나무 숲. 솔무정-들 [솔무평]【마을】 솔무정 앞에 있는 들. 송무-정(松茂亭)【마을】→ 솔무정. 송무-평(松茂坪)【마을】→ 솔무정들. 송정(松亭)【마을】→ 솔무정.

교리(校里)

[향굣골, 교동리]【리】본래 청풍군(淸風郡) 동면(東面)의 지역으로서, 향교(鄕校)가 있으므로 향곳골 또는 교동리(校洞里)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교리라 하여 금성면(錦城面)에 편입되었다가, 1947년 1월 31일 청풍면에 편입됨. 1980년 4월 1일 제천시 시승격에 따라 제원군(堤原郡) 청풍면 교리가 되었으며, 1985년 충주댐 공사로 마을이 침수되어 45가구 중 40여호가 타지로 이주하고 6가구가 신조성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1995년 시군 통합으로 제천시 청풍면 교리가 되었다. 2000년 국민연금단지가 조성되면서 새로운 관광지로 부각되고 있는 마을이다. 교동-리(校洞里)【마을】→ 교리. 교리방단석조물(校里方壇石造物)【탑】지방문화재 제20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절터의 규모는 약 200평 규모임. 금병-암(錦屛岩)【바위】→ 병풍바위. 모래재【고개】 물-굴 [수혈]【굴】바람굴에서 150m 거리에 있는 큰 굴. 물이 고여서 큰 못을 이루었는데, 내부에 10여개의 굴이 있으며 또 종유석(鐘乳石)이 있고, 물이 흐르는 소리가 우렁차게 남. 바람-굴 [풍혈]【굴】 병풍바위 밑에 있는 굴. 아가리이 지름이 2m 정도 되는데, 봄 여름에는 찬 바람이 불어 나오고, 가을 겨울에 바람이 굴속으로 불어 들어감. 병산(屛山)【산】→ 금병산 병풍-바위 [금병암]【바위】 금병산(錦屛山) 밑에 있는 병풍처럼 생긴 바위. 바람굴, 물굴 부엉이굴이 있어서 산이 텅 비어 있다고 병산(甁山)이라고도 함. 부엉이 -굴【굴】 바람굴과 물굴 사이에 있는 굴. 수직으로 굴이 뚫리었는데 그 깊이는 알 수 없으며 부엉이가 살았다고 함. 빈지재 【고개】 사미(沙尾) [샛강, 사이강]【강】→ 청초호. 산제당【당터】큰골 개울 옆 노송 숲안에 당집이 있었으며 정월 초순에 동제를 지냄. 수-혈(水穴)【굴】→ 물굴. 양사재 터(養士齋-)【터】 바람굴 위쪽에 있던 양자재 터. 옛 청풍 고을 선비들의 글방이었음. 여우고개【고개】 진수암지【터】 고려시대의 절터 청초-호(淸草湖) [사미]【강】 수혈 아래에 있는 강. 강물이 이 곳에 이르러 호수를 이루었는데. 물밑이 쪽물처럼 검푸름. 장마철 강물이 불면 강과 합치고 물이 줄면 호수가 됨. 청풍향교-터(淸風鄕校-)【터】 향굣골에 있던 청풍향교터 향교는 충주 댐 수몰 이주시에 물태리 문화재단지에 옮김. 원래 물태리에 있었는데 선조(宣祖) 23년 (1590)에 이 곳 교리로 옮겨 지었으며, 순종(純宗) 융희(隆熙) 원년(1907) 7월에 의병 대장 이강년(李康秊)이 왜적과 격전하는 바람에 모두 소실된 것을 다시 세웠음. 1985년 충주 댐 수몰로 물태리로 옮겨 감. 치마빈장【바위】큰골에 있는 바위산. 풍-혈(風穴)【마을】→ 바람굴. 향굣골【마을】→ 교리. 둔두골【골】 탑골【골】 큰골【골】 중석굴【굴】 말똥바위 【바위】 장수바위【바위】 탑골천【내】

단돈리(丹頓里)

[단돈, 중말]【리】 본래 청풍군(淸風郡) 수하면(水下面)의 지역으로서 주토(朱土)를 캤으므로 단돈(丹頓)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단돈리라 하여 제천군 수하면에 편입되었다가, 1929년 청풍면에 편입됨. 1980년 4월 1일 제천시 시승격에 따라 제원군 청풍면 단돈리가 되었다가 1985년 충주댐 수몰로 전 마을 40여호가 타지로 이주하였다. 1995년1월 1일 시군 통합으로 제천시 청풍면 단돈리가 됨. 단돈(丹頓)【마을】→ 단돈리. 단돈골【마을】윗단돈 깊은 골자기 마을. 대덕산성지(大德山城祉)【성터】청풍호 가운데 섬처럼 남아있는 산 위에 있음.축조연대는 미상이며, 전체 둘레가 약 1㎞ 정도로 추정되는 성터. 마당재【고개】 단돈 서쪽에서 충주시 동량면 조동의 백석으로 가는 고개. 말구재[말고개]【고개】단돈리에서 사오리로 가는 고개. 용마의 무덤이 있다는 전설이 전함. 고개 위에 서낭당이 있었고, 정월 대보름날에는 단돈리와 사오리 청년들간의 석전장이 되었다 함. 아랫단돈【마을】 윗단돈【마을】 바티재【고개】단돈리 후산리 황석리의 경계가 되는 곳에 있는 고개. 사방-고개【고개】 단돈 서남쪽에서 충주시 살미면 지동의 사방으로 가는 고개. 성재【터】성터, 수몰로 섬이 됨. 시갯골【마을】아랫단돈에서 서쪽으로 면산아래의 마을. 용소【들】바티재 아래 성재 옆 장선천 물굽이로 용마가 빠져죽었다는 전설이 전하였다. 중-리(中里)【마을】→ 중말 중-말 [중리, 중촌]【마을】→ 단돈리. 중말-들【들】 중말 앞에 있는 들. 중-촌(中村)【마을】→ 중말. 차돌목 재【고개】윗단돈에서 단돈골 깊은 골짜기를 지나 동량면으로 가는 고개.

단리(丹里)

[단촌리, 단춘]【리】 본래 청풍군(청풍군) 근서면(近西面)의 지역으로서, 단촌리(丹村里)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제천군 비봉면(飛鳳面)에 편입되었다가, 1918년 청풍면에 편입됨. 1980년 4월 1일 제천시 시승격에 따라 제원군 청풍면 단리가 되었다가, 1985년 충주댐 수몰 마을이 됨. 1995년 1월 1일 제천시 청풍면 단리가 됨. 단령봉수(丹嶺烽燧)터【봉화터】단리 북쪽 범동골 정상에 위치하여 오티봉수와 청풍봉수의 직봉으로 봉화를 올리던 곳. 단리메주【특산물】전통적인 발효방식으로 제조하여 상품화하고 있으며 우리 고유의 장맛을 간직한 메주로 정평을 듣고 있다. 단촌-리(丹村里)【마을】→ 단리. 도툰-고개【고개】 단리 동북쪽에서 도리(도툰)로 가는 고개. 본-마을【마을】단리의 원 마을. 실리곡-재(實利谷-)【고개】 단촌리 동쪽에서 실리곡리로 가는 고개. 진두-고개【고개】→ 단리 동북쪽에서 도리 진두로 가는 고개. 단청교 【다리】수산면 고명리와 경계지점에 놓여진 철근콘크리트 교량.

대류리(大柳里)

[한버들, 한 벌골,대류수리]【리】 본래 청풍군 근서면(近西面)의 지역으로서, 큰 버드나무가 있었으므로 한버들, 한 벌골 또는 대류수리(大柳樹里), 대류리(大柳里)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대류리라 하여 제천군 비봉면(飛鳳面)에 편입되었다가, 1918년에 청풍면에 편입됨. 1980년 4월 1일 제천시 시승격에 따라 제원군 청풍면 대류리가 되었다가 제천시 청풍면 대류리가 됨. 1985년 충주댐 수몰마을이 됨. 건너말-못【못】대류리에 있는 못으로 농업용수로 이용되고 있다. 구-점(舊店)【마을】 한버들 남쪽에 있는 마을. 옹기점이 있었는데, 도곡리에 새로 점이 생기면서부터 이 곳을 구점이라 함. 구점-들【들】 구점 앞에 있는 들. 대류수-리(大柳樹里)【마을】→ 대류리. 마미-골【마을】→ 배밋골. 바미-골【마을】→ 배밋골. 배밋-골 [바미골, 야비동, 마미골]【마을】한버들 동쪽에 있는 마을. 지형이 논배미처럼 생겼다 함. 배밋골-논【논】배밋골에 있는 논. 비봉교회【교회】대류리 소재 수몰후에 새로 생김. 생강【특산물】황토에서 자란 생강은 표피가 단단하여 저장력이 뛰어나다고 인기가 높음. 야미-동(夜美洞, 夜味洞)【마을】→ 배밋골. 장그봉-재【고개】한버들에서 배미골로 넘어가는 고개로 정월 초순 떡시루, 실, 과일 등 진설하고 동제를 지내던 곳. 한-버들【마을】→ 대류리. 한벌-골【마을】→ 대류리.

도곡리(陶谷里)

[도곡, 질골, 새점, 신점]【리】 본래 청풍군 근서면(近西面)의 지역으로서, 질흙이 많으므로 질골 또는 도곡(陶谷), 새로이 도기점을 차렸으므로 새점 또는 신점(新店)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도곡리라 하여 제천군 비봉면(飛鳳面)에 편입되었다가, 1918년 청풍면에 편입됨. 1980년 4월 1일 제원군 청풍면 도곡리가 되었다가 1985년 충주댐 수몰마을이 됨.,1995년 1월 1일 시군 통합에 따라 제천시 청풍면 도곡리가 됨. 공립(公林)-뜰【들】 도곡리 남쪽에 있는 들. 권용일(權用佾) 묘 【무덤】도곡과 용곡의 경계지점에 위치하며 한말 의병장으로 호는 청은(淸隱) 본관은 안동으로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음. 도-곡(陶谷)【마을】→ 도곡리. 류시형효자각(柳時馨孝子閣)고곡 서쪽 류씨네 선산에 위치함.부부와 형제의 효행을 기리는 효자각. 새-점【마을】→ 도곡리. 새점-들【들】→ 새점네 있는 들. 신-점(新店)【마을】→ 도곡리. 어둠골 【골】 도곡 마을 북동쪽에 위치한 골짜기로 골이 깊고 숲이 많아 낮에도 어두워 어둠골이라 함. 원당(遠堂)【마을】도곡 서쪽에 있는 마을. 조선 시대 여행자의 편의를 도모하여 숙식을 제공하던 원집이 있었다 함. 제장골-고개【고개】새점 북쪽에서 제장골로 가는 고개. 질-골【마을】→ 도곡리. 지프실 【골】원당의 북쪽 골짜기로 골이 깊다 하여 깊은 골, 짚으실이라고 함

도리(道里)

[도툰, 도촌리]【리】 본래 청풍군 읍내면(邑內面)의 지역으로서, 도툰 또는 도촌리(道村里)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도리라 하여 제천군 비봉면(飛鳳面)에 편입되었다가. 1918년 청풍면에 편입됨. 1980년 4월 1일 제천시 시승격에 따라 제원군 청풍면 도리가 되었다가 1985년 충주댐 수몰 마을이 됨. 1995년 1월 1일 시군 통합에 따라 제천시 청풍면 도리가 됨. 단촌-고개【고개】 도리 서남쪽에서 단리(단촌)로 가는 고개. 도촌-리(道村里)【마을】→ 도리. 도툰【마을】→ 도리. 배-턱【나루】→ 진도. 배-턱이【마을】→ 진도. 쇠뚜리방-골【마을】→ 도리에 있는 마을. 진도¹[배턱이, 진두]【마을】 진도 옆에 있는 마을. 진도²[배턱, 진두]【나루】도툰 동남쪽에 있는 나루터. 진두¹(津頭)【마을】→ 진도. 진두²(津頭)【나루】→ 진도.

도화리(桃花里)

[도화동]【리】 본래 청풍군 동면(東面)의 지역으로서, 수석(水石)이 기묘한 경치를 이루어 도화동(桃花洞)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도화리라 하여 제천군 금수면(錦繡面)에 편입되었다가, 1917년 금성면의 지역이 되었는데, 1929년 10월 14일 청풍면에 펀입됨. 1980년 4월 1일 제천시 시승격에 따라 제원군 청풍면 도화리가 되었다가 1985년 충주 댐 수몰 마을이 됨. 1995년 1월 1일 시군 통합에 따라 제천시 청풍면 도화리가 됨. 국창광업소【광】망월산 중턱에 위치하였으며 금, 아연 채광을 하였으나 지금은 폐광됨. 도화-동(桃花洞)【마을】→ 도화리. 도화동-천(桃花洞天) [취적대, 취벽대, 와선대]【바위】 도화리에 있는 바위. 수석(水石)이 매우 아름다우므로 부사(府使) 이계원(李啓遠)이 바위 면에 ‘도화동천제일강산(桃花洞天第一江山)’ 의 여덟 글자를 새기고, 서파(西坡) 오도일(吳道一)이 ‘취적대(吹笛臺), 와선대(臥仙臺)’라 새겼음. 떡국-재【고개】→ 유판재. 새-터【마을】→ 도화동 동북쪽에 새로 된 마을. 성-안 (城-안)【성】→ 성안에 있다고 하여 성안. 와선대(臥仙臺)【바위】→ 도화동천. 유판-째[떡국재]【고개】 도화동 남쪽에서 수산면 서곡리로 가는 고개. 300여 년전 판사를 지낸 유씨(柳氏)가 벼슬을 내놓고 내려와 살다 갔다 함. 이씨부조-묘 (李氏不?廟)【사당】 도화리에 있는 한계군(韓溪君) 이 공기(李公沂)으 불천지위(不遷之位) 사당. 취벽-대(翠碧臺)【바위】→ 도화동천. 취적대(吹笛臺)【바위】→ 도화동천. 현도관 터(玄都觀-)【터】 도화리에 있는 현도관 터. 권상신(權尙愼)이 창건하였었음.

방흥리(芳興里)

[방흥동]【리】 본래 청풍군(淸風郡) 수하면(水下面)의 지역으로서, 방흥동(芳興洞)이라 하였다. 방(芳)은 살구꽃이 많이 피는 마을이라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방흥리라 하여 제천군 수하면(水下面)에 편입되었으며 수하면의 소재지였다가, 1929년 10월 14일 청풍면에 편입됨. 1980년 4월 제천시 시승격에 따라 제원군 청풍면 방흥리가 되었다가 1985년 충주 댐 수몰마을이 됨. 고부소【소】 방흥과 후산동 경계지점 강심이 깊은 곳. 후산천이 합수되는 곳. 권가벽댁 고가 【고가】천석군의 부자집으로 본채는 72년 대홍수로 유실되고, 행낭채는 1980년 헐리어 활산리 강릉 유씨 재실 짓는 재목으로 쓰였음. 방흥-동(芳興洞)【마을】→ 방흥리. 벼락바위 【바위】청룡벼루 위의 바위산, 바위 끝에 종종 호랑이가 나와 앉았다는 속설이 전하는 바위. 살-여울 [살탄]【여울】→ 방흥동 앞 한강에 있는 여울. 살-탄[전탄(箭灘)]【여울】→ 살여울. 숫소바위【바위】 방흥마을 앞 강 가운데 있는 바위 암소바위와 50m정도 떨어져 있음. 암소바위【바위】 방흥마을 앞 500m 거리 강 가운데 있는 바위. 오미-고개【고개】 방흥 서쪽에서 오산리 오미로 가는 고개. 청룡벼루【벼루】 황석쪽으로 가는 길가의 벼루.

부산리(婦山里)

[며뉘산, 부산, 면산]【리】본래 청풍군 수하면(水下面)의 지역으로서, 면위산(免危山) 또는 며누리산(婦山) 밑이 되므로 며뉘산, 면산, 부산(婦山) 또는 부산리(婦山里)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따라 다시 부산리라 하여 제천군 수하면의 지역이 되었다가, 1929년 10월 14일 청풍면에 편입됨. 1980년 4월 1일 제천시 시승격에 따라 제원군 청풍면 부산리가 되었다가 1985년 충주 댐 공사로 일부마을이 수몰됨. 1995년 1월 1일 시군통합으로 제천시 청풍면 부산리가 됨. 갑옷바위【바위】 큰골 산령각 옆에 있는 바위. 갑옷을 숨겨둔 상자 형상을 하였으며, 이 바위를 움직이려 하면 뇌성벽력을 친다고 전함. 달랑-고개【고개】 면산 북쪽에서 장선리로 가는 고개. 며뉘-산【마을】→ 부산리. 면산【마을】 부산리 남서쪽으로 우뚝 솟아있는 산 면-산【마을】→ 부산리. 부-산(婦山)【마을】→ 부산리. 솔봉【산】중터말 위의 바위산으로 소나무 숲이 우거짐. 아래말【마을】 장선천에서 면산 쪽으로 오르는 언덕에 있는 마을. 옥녀봉【마을】 면산 정상봉우리. 옥녀봉에는 장마 가물에도 수량이 일정한 옹달샘이 있는데 속병에 약효가 있다고 전함. 웃말【마을】 면산아래 마을. 산에 대한 외경심으로 웃말 위로는 무덤을 쓰지 않는 것이 이 마을의 관례로 되어 있다. 중서렁골 동굴【동굴】 10여명 은신가능한 동굴로 6.25 때 이곳에서 피란을 한 집이 있었다 함. 중터말 【마을】솔봉 아래 마을. 큰골【골】 웃말 위쪽의 골짜기로 구한말 이강녕 장군 휘하의 의병 중대본부가 있었다고 전함. 10명 정도가 은신가능한 동굴이 있음. 한지공장터【터】 아랫마을에 있는 한지 공장터.

북진리(北津里)

[북진나드리]【리】 본래 청풍군(淸風郡) 북면(北面)의 지역으로서, 북진나드리 옆이 되므로 북진나드리 또는 북진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금수면(錦繡面)에 편입되었다가, 1917년 금성면의 지역이 되었다가, 1947년 1월 31일 청풍면에 편입됨. 1980년 제천시 시승격에 따라 제원군 청풍면 북진리가 되었다가 1985년 충주 댐 수몰 마을이 되어 70호 중 12호가 너분머리에 새마을을 조성하고 이사함. 교리에서 7호 등 외지에서 이주해 와서 30여호 마을이 됨. 1995년 1월 1일 시군통합으로 제천시 청풍면 북진리가 됨. 너분머리 【마을】수몰전에는 굼밭이 많던 벌판이었고, 수몰 후북진리 새마을이 조성된 곳. 애잠막골【골】 교리쪽으로 가는 산비탈 골자기, 애기무덤의 공동묘지로 쓰였던 곳. 북진-나드리¹【마을】→ 북진리. 북진-나드리²[북진나루, 북창나루, 북창진]【나루】 북진나드리 앞에 있는 나루터. 옛 청풍 읍내의 북창 앞이 됨. 제천과 청풍을 연결하는 중요한 뱃길임. 북진-나루(北津--)【나루】→ 북진나드리. 북창-나루【나루】→ 북진나드리. 북창-여울[북창탄]【여울】 북창나루 앞 한강에 있는 여울. 북창진(北倉津)【나루】→ 북진나드리. 북창탄(北倉灘)【여울】→ 북창여울. 북창-터(北倉-)【터】북진나드리 북쪽에 있는 창고 터. 옛 청풍현(淸風縣)에 딸린 북창이 있었음. 쪽두리개울【마을】 북진리의 한 마을. 북진리에서 성내리 두둑 벌판으로 이어지는 곳에 있던 마을. 쪽두리개울【내】 성내리 보륜골에서 흘러내려 동강내와 만나 남한강에 류입되는 개울. 쪽두리바우【바위】 북진에서 성내리 안암으로 가는 길목에 있던 쪽두리모양의 바위가 있었는데 신작로 공사 때 폭파되어 없어졌다고 함. 이 바위 이름을 따서 마을이름이 족두리개울 이었음. 평나무재【고개】 애잠막골을 지나 교리로 가는 고개. 허리길 【길】금병산쪽으로 청초호수에 이르는 비탈길. 회사집 【고가】북진에서 제일 큰 가옥.

사오리(査伍里)

[사호룬, 사오, 새오리]【리】 본래 청풍군 수하면(水下面)의 지역으로서, 사호룬 또는 사오(査伍), 새오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사오리라 하여 제천군 수하면에 편입되었다가, 1929년 10월 14일 청풍면에 편입됨. 1980년 4월 1일 제천시 시승격에 따라 제원군 청풍면 사오리가 되었다가 1985년 충주 댐 수몰 마을이 됨. 1995년 시군통합으로 제천시 청풍면 사오리가 됨. 사오(査伍)【마을】→ 사오리. 사호룬【마을】→ 사오리. 사호올-들【들】→ 사호룬에 있는 들. 새오-리【마을】→ 사오리. 중말-고개【고개】사오 남쪽에서 단둔리 중말로 가는 고개.

신리(新里)

[신촌리]【리】 본래 청풍군 근서면(近西面)의 지역으로서,새로 된 마을이므로 신촌리(新村里)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신리라 하여 제천군 비봉면(飛鳳面)에 편입되었다가, 1918년 청풍면에 편입됨. 1980년 4월 1일 제천시 시승격에 따라 제원군 청풍면 신리가 되었다가 1985년 충주 댐 수몰 마을이 됨. 1995년 1월 1일 제천시 청풍면 신리가 됨. 가마-바우¹【산】가마바우가 있는 산. 가마-바우²【바우】 거무재 아래에 있는 바위. 가마처럼 생겼다 함. 거무-재¹【마을】 거무재 밑에 있는 마을. 거무-재²[흑성산]【산】 신촌리 동쪽에 있는 산. 봉우리가 거미처럼 생겼다 함. 매-봉【산】 신촌리 동쪽에 솟아 있는 산. 비봉산 -동굴【동굴】비봉산 중턱에 있는 자연동굴로 약 30m정도 들어가면 석순과 종유석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함 사흘-가리【밭】 가마바우에 있는 밭. 밭을 가는데 사흘 걸렸었다 함. 설매-실【마을】 신촌리 남쪽에 있는 마을. 소신-못【못】 가마바위 밑에 있는 못. 쉬언댕잇-재【고개】→ 연곡리의 ‘서낭댕이’ 신촌-리(新村里)【마을】→ 신리. 인동장씨 제실(祭室)【제실】인동장씨의 제실로 설매실에 위치.

실리곡리(實利谷里)

[실리곡]【리】 본래 청풍군 읍내면(邑內面)의 지역으로서, 실리곡(實利谷)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실리곡리라 하여 비봉면(飛鳳面)에 편입되었다가, 1918년 청풍면에 편입됨. 1980년 4월 1일 제천시 시승격에 따라 제원군 청풍면 실리곡리가 되었다가 1985년 충주 댐 수몰마을이 됨. 1995년 1월 1일 제천시 청풍면 실리곡리가 됨. 너실-고개【고개】 실리곡에서 수산면 도전리 너실로 넘어가는 고개. 뒷-고개【고개】 실리곡 뒤쪽에서 수산면 서곡리로 가는 고개. 실리-곡(實利谷)【마을】→ 실리곡리. 홈실-고개【고개】 실리곡 서쪽에서 수산면 서곡리 호무실로 넘어가는 고개.

양평리(陽坪里)

[양지편, 양평말]【리】 본래 청풍군 근서면(近西面)의 지역으로서, 양지쪽 들 옆에 위치하였으므로 양지편, 양평말 또는 양평리(陽坪里)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양평리라 하여 제천군 비봉면(飛鳳面)에 편입되었다가, 1918년 청풍면에 편입됨. 1980년 4월 1일 제천시 시승격에 따라 제원군 청풍면 양평리가 되었다가 1985년 충주 댐 수몰 마을이 됨. 1995년 1월 1일 시군통합으로 제천시 청풍면 양평리가 됨. 노가리 [노곡]【마을】 뒷들 동북쪽에 있는 마을. 전에 갈대가 많았음. 노-곡(蘆谷)【마을】→ 노가리. 느티나무【나무】양평리 자른고개에 있는 수령 500년된 노거수로 옛날에 당집을 짓고 정월에 마을에서 제사를 지내던 나무임 뒷-들¹[후평]【마을】 뒷들에 있는 마을. 뒷-들²[후평]【들】 양평말 북쪽에 있는 들. 뒷들-나루 [후평진]【마을】 뒷들 앞에서 방흥리로 건너는 나루터. 사창 터(社倉-)【터】 양평말 뒤에 있는 옛 사창 터. 양지편【마을】→ 양평리. 양지-말【마을】→ 양평리. 유자하-효자각(柳自河-孝子閣)【비】서기 1500년대에 세운 것으로 효자 유자하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놓음 후-평¹(後坪)【마을】→ 뒷들. 후-평²(後坪)【들】→뒷들. 후평-진(後坪津)【나루】→뒷들나루.

연론리(連論里)

연론리(蓮論里)[연론]【리】 본래 청풍군 근서면(近西面)의 지역으로서, 연론리(連論里)라 하였는데, 1913년 12월 29일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연론리라 하여 제천군 비봉면(飛鳳面)에 편입되었다가, 1918년 청풍면에 편입됨. 1980년 4월 1일 제천시 시승격에 따라 제원군 청풍면 연론리가 되었다가, 1985년 충주댐 수몰 마을로 미수몰 지역 갱기터와 호미실 마을이 존속하여 법정동리와 행정동리가 존속함, 1991년 1월 1일 제천군 청풍면 연론리, 1995년 1월 1일 시군통합으로 제천시 청풍면 연론리가 되었다. 6개반 수몰. 가라-현(加羅峴)【고개】→ 경심령 가라현(379m)은 경심령이다. 갱기터에서 남서향으로 한수면 갱그터【마을】→ 갱기터. 갱기터 [更基址]【마을】 연론리 7반인 갱기터(150~175m)는 미수몰지역으로 현재 연론리 본동으로 13호가 거주한다. 옛날에 마을의 서향에 경심령은 산적의 약탈이 심하여 5~6명이 한 조를 이루어 함께 올라간 터라 하여 ‘갱기터’라고 한다. 갱기터→갱그터로 변천되었다. 경로당【경로당】 1994년 12월 1일 준공한 경로당은 연론리 山58번지 1층 56㎡이다. 경심-령(驚心領) [가라현]【고개】 연론리 남쪽에서 한수면 서창리로 가는 고개. 조선 시대 청풍에서 충주로 가는 관행길이 었는데, 가마를 매고 넘을 수 없으므로 가마에 끈을 달아 고개 위에서 끌어당겨 넘었다 함. 경심-령(驚心領) [가라현]【고개】 연론리 남쪽에서 한수면 서창리로 가는 고개. 조선 시대 청풍에서 충주로 가는 관행길이 었는데, 가마를 매고 넘을 수 없으므로 가마에 끈을 달아 고개 위에서 끌어당겨 넘었다함.고갯마루에 산적이 은둔하여 장사꾼과 관행차를 습격하여 물건을 약탈한 곳으로 행인들이 고개를 넘을 때 부스럭거리는 짐승의 소리에도 놀란다고 하여 경심령(驚心嶺)이라 한다. 곳집거리【상엿집】 연론리 갱기터와 용곡리 사이에 두 마을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상여를 보관한 상여각이다. 급수시설1【수원지】 1983년 갱기터에 계곡수를 이용한 소규모급수시설은 1일 14톤의 용량으로 54명이 급수할 수 있다. 급수시설2【수원지】 1984년 새마을 지하수를 이용한 소규모급수시설은 1일 8톤의 용량으로 32명이 급수할 수 있다. 대곡방하 약수터【약수】→ 큰골 약물탕. 대로【길】→ 큰길가. 대로방【길】 연론리 4반 큰길가는 이승만 정권시 ‘대로방’이라 일컬을 만큼 큰길이었다. 대승마린【공장】 연론리 새마을에서 어선을 제조하는 공장이다. 덕실재【고개】 연론리의 최남단의 고지대 호무실(해발 175~200m)에서 남쪽에 소재한 한수면 덕곡리를 넘어가는 고개이다. 호무실 주민은 덕실재(해발 307.5m)로 황강장을 보러 다니고, 수몰후 연론리 주민은 가라현을 넘지 않고 덕실재로 통행한다. 돌투방골【골】 갱기터에서 가라현으로 오르는 중도에 서쪽의 산등성이에 돌이 많아서 ‘돌투방골’이라 한다. 딱박골【골】 갱기터에서 가라현으로 등정하는 중도(해발 225m)에 서쪽의 골짜기에 닥나무가 많아서 ‘딱박골’이라 한다. 마을창고【창고】 1975년 건립한 마을창고는 32평이다. 수몰. 마을회관【회관】 1975년 건립한 마을회관은 25평이다. 수몰. 매봉[鷹峰]【산】 갱기터 마을에서 남동향에 응봉(鷹峰)(422.2m)은 고명리와 연접한 산이다. 모개나무골【골】 매봉 아래 북쪽으로 큰골이 이어진 지금의 도로 아래쪽에 안말의 골짜기를 말한다. 일부 수몰. 무대이【마을】 연론리 2반으로 도랑가에 마을이 있다하여 ‘무대이’라고 한다. 수몰. 문지방재【고개】 안말에서 동향에 단리를 넘어가는 고개. 물푸레골【골】 갱기터 동쪽에 앞산의 골짜기에 물푸레나무가 많아서 ‘물푸레골’이라 한다. 미사리재【고개】 연론리 1~3반과 4~8반을 구분하는 고개에서 동제를 지내고 쥐불놀이와 횃불놀이를 하였다. 수몰전 1반 제비골 13호, 2?3반 웃기리 22호는 중심마을 안말에서 위에 있다하여 ‘웃말’이라 한다. 일부 수몰. 벌-밭【밭】 갱기터에서 경심령으로 오르는 중도의 좌측 골짜기에 2천여평의 산전을 개간한 밭. 삼막골【골】 갱기터에서 동남동쪽 매봉 아래 큰골로 진입하는 길에서 우측의 골짜기를 말한다. 상길-리(上吉里)【마을】→ 웃길리. 새들【들】 연론리 5반 지역에 새로 만든 들판을 말한다. 수몰. 새마을【마을】 갱기터에서 동북동쪽에 수몰후 연론리 수몰민이 형성한 새마을에 7세대가 거주하고 있다. 새번지【논】 갱기터에서 가라현으로 올라가는 중도(해발 300m)의 路邊에 새로 만든 답으로 현재 경작하지 않는다. 서-곡(鋤谷)【마을】→ 호미실. 선바위【바위】 갱기터 동쪽의 앞산에 방아확 형상의 자연석을 말한다. 선심골【골】 전설속의 효녀 선심이가 살았던 갱기터 골짜기로 전한다. 2001년 5월 21일 갱기터 마을과 동쪽의 앞산을 배경으로 주민이 출연하여 KBS-2TV에서 ‘孝찾아 삼천리’의 한편을 녹화하여 방영했다. 아랫말【마을】→ 갱기터. 안말【마을】 연론리의 중심 마을 4반이다. 수몰. 안무대이【마을】→ 무대이. 안암박골【골】 연론리 호무실에 있다. 연골[蓮谷]【마을】→ 연론리. 연론(連論)【마을】→ 연론리. 영계【마을】 연론리 5반으로 예전에 불모지대였으나 하천의 개흙이 퇴적하여 沃土의 들판으로 변하여 영계, 영개로 변천하였다. 수몰. 용구미【샘】 안말에 논 한복판에서 극냉한 물이 솟는다고 하여 ‘聳구미’라고 한다. 수몰. 우석아렌씨광산【광산】 매봉 아래 큰골에 1998년부터 채광한 콘크리트용 채석광산이 있다. 웃-길리 [상길리]【마을】 연론 위쪽에 있는 마을. 웃-말【마을】→ 웃끼리. 웃끼리[웃기리]【마을】 연론리 2, 3반 지역으로 웃말에 있어서 ‘웃끼리’라고 한다. 본래 1, 2, 3반이 상길리의 부락으로 연론리에 통합되었다. 上吉里→웃길리→웃기리→웃끼리로 변천하였다. 수몰. 자라등【산】 영개 마을에서 서쪽에 산등성이는 자라 형상의 등처럼 생겨서 ‘자라등’이라 한다. 자살고개【고개】 연론리 3반과 단리의 경계에 고개. 잘개미골【골】 안말에 들판은 늪지가 형성되어 땅이 질다고 하여 ‘잘개미골’이라 한다. 수몰. 절터골【골】 연론리 새마을 입구 도로변에서 서쪽의 구렁에 1930년대 이전에 작은 암자가 있었는데 빈데가 꼬여서 폐사되었다고 한다. 현재 와편이 발견되고 있다. 정실령【고개】→ 경심령. 제비골【골】 연론리 1반으로 지대가 가장 낮은데 소재하였다. 지형이 제비의 꼬리와 같아서 ‘제비골’이라 한다. 수몰. 진다락골【골】 갱기터에서 동쪽의 앞산 측면에 황토흙으로 땅이 질척이는 골이라 하여 ‘진다락골’이라 한다. 큰골약물탕【약수】 매봉에서 북향의 산록으로 100여m 아래 돌틈에서 흐르는 물줄기로 장마철에도 수량이 크게 증가하지 않으며 나무 홈통을 만들어서 흐르게 하였다. 매우 차고 석회질을 함유했으나 물맛이 좋아서 약수로 이용하며 목욕을 하면 피부병이 말끔히 낳는다고 전한다. 매봉에서 발원하는 물줄기는 큰골로 흘러서 안말의 모개나무골을 거쳐서 잘개미골을 지나서 유다리[柳橋]로 흘러서 고명천과 합류하여 남한강으로 흘렀다. 큰골짜기[大谷]【골】 갱기터에서 남동향의 매봉에서 북경사의 골짜기. 큰길가【마을】 연론리 6반으로 고을 수령이 왕래한 관행길 대로라 하여 ‘큰길가’라고 부른다. 수몰. 호미실[鋤谷]【마을】 연론 동남쪽에 있는 마을. 갱기터 남남동쪽에 위치한 마을(해발 175~200m)로 산에서 내려다 보면 마을의 형세가 호미[鋤]처럼 생겼다 하여 ‘호미실’이라 한다.

오산리(伍山里)

오산리[오미?오매?오산]【마을】 본래 청풍군 수하면의 지역으로서, 다섯 봉우리가 둘러 있는 안이 되므로 오미, 오매 또는 오산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오산리라 하여 제천군 수하면에 편입되었다가, 1929년 11월 1일 청풍면에 편입됨. 동년 제천군 청풍면 오산리, 1980년 4월 1일 제천시 시승격으로 제원군 청풍면 오산리, 1985년 충주댐 수몰마을로 행정동리는 부산리로 편입되었다. 일부 수몰. 강태수【마을】오미 동남쪽 강가에 있는 마을. 웃오미 중턱말에서 북쪽의 계곡에 세 가구가 거주했으나 철거한 이래 현재 외지인 2가구가 거주한다. 감나무가 많고, 벌통이 있으며, 개를 사육하고 담배와 고추를 재배한다. 느티매기【마을】오미 동쪽에 있는 마을. 큰 느티나무가 있었음. 둔들배기【마을】 둔덕진 곳에 있음. 수몰전 오미 아랫마을에서 보면 높게 둔덕진 곳으로 지금의 웃오미에 있는 중턱말이다. 뒷골재【고개】웃오미에서 서쪽으로 진목리 갈골로 넘어가는 고개. 뒷산【산】 오미 서북쪽 뒤에 있는 산. 일제시대 일본인 소유 임야가 11만여평이나 된다고 한다. 당시 일본인이 나무를 관리할 때 나무마다 붉은천으로 표식하여 한 그루라도 주민이 벌목할 수 없었다. 마당재【고개】오산리 북쪽에 있는 고개(492m)에 오산리, 방흥리, 단돈리로 가는 세 갈래로 ‘삼거리’라 하며, 봉우리가 편평하여 ‘마당재’라 한다. 이곳에 장수가 태어난다는 명당으로 장수의 묘소가 있다고 전하는 곳으로 ‘묘골’이라 한다. 마을회관터【터】 1973년 15평의 마을회관을 건립하였으나 현재 터만 남았다. 묘곡【골】→ 마당재. 박쥐굴【굴】→ 황새봉. 뱀산【산】→ 보문봉. 보문봉【산】웃오미 중턱말에서 남남동(160도)쪽에 있는 오산의 하나이다. 이 산의 아래 골짜기에 물을 가두는 보가 있었다 하여 보문봉(202.5m)이라 한다. 또 뱀이 많이 산다고 하여 ‘뱀산’이라 한다. 부엉이굴【굴】→ 황새봉. 서낭목【서낭】오산리 동구밖 느티나무 암수 서낭목에서 매년 7월경에 동제를 지내고, 호미씻이의 행사로 국수와 술 등의 음식을 들며 흥겹게 놀았다. 수몰. 솔봉【산】오미 앞에 있는 산. 큰 소나무가 서 있음.웃오미 중턱말에서 북쪽에 있는 오산의 하나이다. 봉우리에 큰소나무가 서 있었다 하여 송봉(253.2m)이라 하며, 앵형국(꾀꼬리형국)이라 전한다. 정상부에 남씨가 묘소를 썼는데 이장 후 집안이 패망하여 다시 묘소를 이장하여 썼다고 한다. 수청-바우【바위】 강태수 앞 물가에 있는 바위. 5m. 마귀할멈이 이고 가다가 내려 놓은 것이라고 전함. 중턱말에서 북쪽에 있으며, 강태수 마을 입구 도로에서 약 450m 지점(해발 220m)의 계곡에 있다. 바위의 뒤쪽에서 1.8m의 높이로 바위의 윗면은 남동쪽 5m, 남서향 8m이다. 이 바위는 영험이 있다하여 가뭄이 들 때 동물의 피를 흘리면서 기우제를 지냈다. 일명 ‘호랑이바위’라 하여 함부로 어린이가 올라가지 못하게 하였다. 숲-안【숲】 웃오미 강태수골에 숲이 우거진 곳이라 하여 숲안이라 부르며, 집 한 채가 있었다. 안태봉【산】 오미 동쪽에 솟아 있는 산. 옛날에 태를 묻었다 함. 중턱말에서 동북동(60도)쪽 마을 입구에 있는 오산의 하나로 옛날에 王子의 태를 묻은 곳이라 하여 안태봉(215m)이라 한다. 1950년대 안태봉 정상부에 묘소를 쓸 때 정방형 개석(장 2m 후 0.6m) 아래 태실에 태호를 발견했으나 도굴당했다 함. 앞-산【산】 오미 앞에 있는 산. 마을의 앞쪽에 산이 있다하여 앞산(282m)이라 하며, 중턱말에서 동남동(110도)쪽에 소재한 오산의 하나이다. 오-매【마을】→ 오산리. 오-미【마을】→ 오산리. 오-산【마을】→ 오산리. 오봉【산】 마을에 다섯개의 산봉우리가 둘러있는데, 마을의 뒷산에 솔봉, 동편에 안태봉, 앞산, 황새봉, 보문봉이 어우러져 ‘伍山’이라 하며 일명 ‘伍峰’이라 한다. 오산(伍山)【마을】→ 오미리. 웃-오매【마을】→ 웃오미. 웃-오미 [웃으매]【마을】 오미 위쪽에 있는 마을. 웃오미[웃오매]【마을】 오미 위쪽에 있는 마을. 남쪽에 진목리와 오산리를 경계로 진목리는 아랫오미, 오산리는 웃오미라 한다. 일부 수몰. 재집움달【마을】 강태수골에 기와집이 있었다 하여 ‘재집’이라 하며 주변에 대추나무가 많아서 ‘움달’이 져서 ‘재집움달’이라 한다. 절-골【골】 웃오미 새마을 회관에서 북서쪽의 골짜기가 절골이다. 절터는 알 수 없으며, 산등을 넘으면 동량면이다. 중턱-말【마을】→ 중툭말. 중툭말[중턱말]【마을】 오산리 복판에 있는 마을. 오산리 둔들배기(해발 150m)에 소재한 마을로 지금의 본동이다. 큰고개【고개】 오산리 마을에서 방흥리로 넘어 가는 고개. 황새봉【산】 오미 남쪽에 있는 산. 산 밑에 굴이 있는데, 황새가 드나듦. 중턱말에서 남남동(160도)쪽에 소재한 황새봉(188.7m) 아래 있는 석굴은 어른이 고개를 숙이고 들어갈 수 있는 입구로 깊이는 알 수 없으나 찬바람이 불어 나오고 박쥐가 떼를 지어서 산다고 하여 ‘박쥐굴’이라 하며, 부엉이가 새끼를 치고 살았다 하여 ‘부엉이굴’이라 한다.

용곡리(龍谷里)

용곡리(龍谷里) [용복리, 용복, 용곡]【리】본래 청풍군 근서면(近西面)의 지역으로서, 지형이 용이 엎드려 있는 것 같다 하여 용복리(龍伏里)라 하다가, 상룡리(上龍里)와 하룡리(下龍里)로 나뉘었는데,1913년 12월 29일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다시 두 마을과 眞谷里를 병합하여 용곡리라 해서 제천군 飛鳳面에 편입되었다가, 1917년 청풍면에 편입, 제천시 시승격으로 인하여 1980년 4월 1일 제원군 청풍면 용곡리, 1985년 충주댐 수몰 마을로 상용의 미침수 지역에 용곡리 마을을 조성하여 법정동리와 행정동리를 계승함, 1991년 1월 1일 제천군 청풍면 용곡리, 1995년 1월 1일 제천시?군이 통합되면서 제천시 청풍면 용곡리가 되었다. 구용곡리 수몰. 골안골【골】상용곡에서 남서쪽 관봉 아래 골짜기를 말한다. 지금의 용곡리 도로에서 계속 오르면서 Y자형으로 갈리는 지점에서 左側의 골짜기를 아울러서 弓形을 ‘골안골’이다. 골안골 제당의 전면 개울에 용바위가 있으며, 용머리의 형세라 하고, 이 골에 거주한 주민은 1960년대 본동으로 이주했다. 관봉【산】용곡리의 남서쪽에 가장 높은 산으로 정상부에 삿갓을 씌워 놓은 형상이라 하여 관봉(冠峰)(529.6m)이라 한다. 이 봉우리에서 봉화를 올린 곳이라 전하며, 일제시대 쇠말뚝을 박았다고 전한다. 급수시설【수원지】1984년에 설치한 급수시설은 용곡리 계곡수를 이용하여 급수인구 42명으로 1일 16톤의 용량이다. 관봉 아래 골안골 절터 앞에 취수장을 설치하였다. 마을회관【회관】참실 삼거리에 1972년 마을회관 20평을 건립하였다. 수몰. 망태봉(望太峰)【산】상용곡에서 남서쪽에 있는 산(320.7m)으로 주변 마을을 모두 관망할 수 있다. 문화생활관【복지】1995년 8월 21일 준공한 용곡리 문화생활관은 440번지 4호에 위치하며 1층 165㎡이다. 삼거리【길】마을회관에서 상용, 하용, 참실로 가는 길이라 하여 ‘삼거리’라 한다. 수몰. 상-룡(上龍)【마을】→ 상용복. 상용복(上龍伏)【마을】용곡 위쪽에 있는 마을. 관봉 아래 골안골과 재피골에서 흘러온 계곡물이 마을에 이르러 용두형국이라 하여 ‘상용’이라 한다. 수몰전 70여호 거주. 성황뎅이【서낭】상용곡 동쪽에 연론리로 넘어가는 고개(150m)에 황토흙이 너무 질어서 ‘진등’이라 하며, 고갯마루에 약 600년 수령의 노거수 느티나무(흉고주 7.3m)는 주민의 쉼터로 단오절에 그네타기를 하고, 신목으로 삼아 성황뎅이라 하여 동제를 지내고 있다. 세골[三谷]【골】 상용곡 동향에 서낭당고개에서 북동쪽으로 야산(최고 176m)이 3개의 골이 움푹한 형세라 하여 ‘세골’이라 한다. 일부 수몰. 수리봉【산】 용곡리에서 남서쪽에 관봉과 경심령 사이에 있는 산. 수용사 터【절터】 상용곡 남서쪽 관봉 아래 골안골과 당집 사이에 사지에서 와편이 출토된다. 주민은 절터를 가리켜 ‘절앞’이라고 부른다. 이 절은 수리봉 하에 ‘수용사’라 칭하며, 전설에 주지승이 시주를 마치고 대웅전 중앙에 전에 없었던 원기둥이 생겨서 기둥을 만지니 일시에 무너졌는데, 빈대들이 기둥을 형성한 것으로 빈대 때문에 폐사했다고 전한다. 용-복(龍伏)【마을】→ 용곡리. 용곡(龍谷)【마을】→ 용곡리. 용곡-동굴【굴】1976년 발견된 이 동굴은 굴에서 많은 물이 나와 영농에 이용하기도 하였으며 입구부터 5색 빛깔의 무늬석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약 50m 정도 들어가면 물 때문에 더 이상 들어갈 수 없다고 함. 현재 용곡리 도로 밑에 소재하는데, 석굴이 붕괴되어 들어갈 수 없다. 용곡리(龍谷里)[龍谷]【마을】 일제시대 상용, 하룡, 진곡을 합병한 지명이다. 수몰. 용곡리제당(龍谷里祭堂)【제당】 관봉 아래 골안골에 있는데, 지금의 용곡리에서 서남서쪽 계곡의 소로를 따라 약 150m 오르면 개울 건너 암반 앞에 당집(175m)이 남동쪽을 향한다. 당집은 목조 스레트집으로 크기는 전면 1.67m 측면 1.35m 높이 1.8m이다. 당집 내부의 신체는 송판(세로 83.5㎝ 가로 19.5㎝)에 ‘山神靈座’라고 쓰였다. 용곡마을유적비【비】용곡리 수몰민이 新용곡리 洞口에 1992년 6월 7일 용곡향우회, 진곡친목회일동이 수몰애향비(장 91㎝, 폭 63.5㎝, 후 18㎝)를 세웠다. 용바위【바위】→ 골안골. 용복(龍伏)【마을】→ 용곡리. 용복리(龍伏里)【마을】→ 용곡리. 관봉 아래 골안골의 계곡물이 용복형국이라 하여 ‘용복리’라고 한다. 수몰. 원탑【고적】 하용 입구 석축의 원탑에서 정월 초순경 동제를 지냈다. 원탑의 주변에 소나무, 참나무, 느티나무가 있었다. 1972년 홍수로 훼손되어 새마을 사업 때 원탑을 헐고 콘크리트조와 돌로 축조하여 어린이 놀이터가 되었다. 수몰. 장정현효자비(張井鉉孝子碑)【비】 이 비는 약 80년 흉년이 들어 주민들이 굶주릴 때 경암 장정현(敬菴 張井鉉)이 사재를 털어 굶주린 주민을 도와서 이에 감격한 주민들이 세운 비임. 이 비는 1950년 2월에 세운비(비신 90×39×15㎝)로 청풍문화재단지에 있다. 절앞에【절터】→ 수용사지. 제피골【골】 상용곡 남서쪽에 있는 관봉 아래 골안골이 Y자형으로 갈리는 지점부터 우측의 골짜기를 말한다. 진곡-리(眞谷里)【마을】→ 참실. 진등【고개】→ 성황뎅이. 질매재【고개】 용곡의 뒷산으로 소의 등에 거는 길마 형국의 재를 말한다. 참실[眞谷里]【마을】 상룡복 동북쪽에 있는 마을. 옛날에 역로에서 거쳐 가며 쉬던 참이 있었다 함. 용곡리의 자연부락으로 고명천변에 소재한 참실은 수몰전 25호 거주했었다. 청룡보【보】 참실 아래 고명천에 보를 막았는데 수심이 깊은 푸른 물로 ‘청룡보’라 한다. 수몰. 탑거리【길】 하용 입구 원탑에서 양평과 참실로 가는 길을 말한다. 수몰. 하-룡(下龍)【마을】→ 하용복. 하룡복(下龍伏) [하룡]【마을】 용곡 아래쪽에 있는 마을. 상용곡에서 북쪽에 있는 마을로 수몰전 23호 거주.

읍리(邑里)

邑里 [청풍읍, 읍내, 읍]【리】본래 청풍(淸風) 고을이 있던 곳이므로 청풍읍(淸風邑) 또는 읍내(邑內), 읍(邑)이라 하였는데, 1913년 12월 29일 府令 제111호에 의거 군면폐합에 따라 청풍군은 제천군에 통폐합으로 同年 邑內面과 近西面을 통합하여 飛鳳面으로 개칭하여 官內里의 上里, 中里, 下里를 통합하여 제천군 飛鳳面 邑里라 하였으며, 1917년 面制制定施行으로 비봉면을 청풍면으로 개칭하였다. 청풍면 읍리(해발 120m) 203번지 1호에 소재한 면사무소를 기준으로 웃마을은 邑上里로 평동?본동?새마을, 아랫마을은 邑下里로 下里말?신담?새마을이다. 1980년 4월 1일 제천시 시승격으로 시?군이 분리되면서 제원군 청풍면 읍리가 되었다. 1985년 충주댐 수몰로 물태리 207,396㎡의 부지에 100여세대의 주민과 읍리에 소재했던 공공기관이 입주하여 물태리의 행정리동명을 邑里로 개칭함.. 객사 터(客舍-)【터】읍상리 북쪽, 곧 청풍국민학교 교실 앞에 있는 청풍현(淸風縣)의 객사 터. 수몰. 건건장(乾絹場)【시설】 읍하리에 누에고치 건조장이 있었다. 누에고치를 수매하던 곳.. 수몰. 곧은-물【샘물】망월산성 아래 평동의 강안에서 솟는 샘물을 말한다. 수몰. 관기터【터】금남루 입구에서 우측에 있었다고 한다. 수몰. 관내리【마을】→ 읍리. 관수당 터(觀水堂-)【터】→ 관수헌 터. 관수헌 터(觀水軒-)【터】한벽루 서쪽에 있는 관수헌 터. 수몰. 광성사【보급소】 읍리 369번지에 신문보급소가 있었다. 수몰. 군기고【터】한벽루 남쪽으로 관문 밖에 상리에 있었다. 금남루 옆에 일명 언덕집이 병기고터였으나 소유권이 여러번 변경되면서 개축하여 무기는 없었다고 한다. 수몰. 금남루(錦南樓)【고적】읍상리 북쪽 청풍국민학교 교문으로 되어 있던 문루. 조선 순조(純祖) 29년(1829)에 청풍부사 조길원이 세웠는데. 그 뒤 헐어진 것을 고종(高宗) 7년(1870)에 청풍 부사 이직현(李稷鉉)이 고침. 1976년 12월 23일 지방유형문화재 제20호로 지정, 1983년 청풍문화재단지로 이건하였다. 금병헌 터(錦屛軒-) [명월정터]【터】한벽루와 응청각 사이에 있던 금병헌 터. 수몰. 기와공장【공장】읍하리에 유영각씨가 운영한 기와공장과 부럭공장이 있었다. 수몰. 남산【산】읍리 남쪽 산으로 청풍향교가 있었는데 문인의 사망이 빈번하여 강건너 교리로 이전하였다고 전한다. 1972년 대홍수로 읍리의 주민이 이주한 곳이며, 강물을 끌어올린 취수장 탱크가 있었다. 남산은 공유림으로 무덤이 많았으며, 1984년 남산 뒤에 수몰지의 묘소를 이장한 공동묘지가 있다. 거의 수몰. 남창-못【못】 금남루에서 남서쪽 약 120m 지점 누에고추공판장 옆에 타원형 연못으로 크기는 약 3,000평으로 수심은 약 2.5m이며 붕어가 서식했다. 관아의 건물지를 매립하기 위하여 채토하면서 웅덩이가 생긴 곳이라 전하며, 연못 가운데 동산의 물가에 7개의 큰 독을 매설하여 붕어를 잡았다고 한다. 연꽃이 만발했다. 수몰. 남창거리 [南倉門]【길】옛 관아지에서 남쪽으로 약 200m 지점 청풍면 읍상리 380번지 3호 일대 전답에 남창지가 소재하여 ‘남창거리’, 또는 ‘남창문’이라 부른다. 수몰. 남창문【길】→ 남창거리. 남창터(南倉址)【터】 남창지는 청풍면 읍상리 380번지 3호 논 일대를 ‘남창거리’, ‘남창문’으로 부름. 수몰.. 도지여울[猪灘]【여울】신담 앞강 북진나루 하류에 굽이진 곳의 강여울은 회절하면서 강폭이 협소하여 뗏목이 강가에 걸려서 흩어지던 곳이다. 뗏목이 흐트러진 것을 보고 “돼지우리 짓는다”고 놀리면서 ‘도지여울’이라 불리게 되었다 함.수몰. 도축장【가공】 읍하리 새마을에 돼지와 소의 도축장이 있었다. 수몰. 돌샘거리【길】 남산 아래 샘터로 가는 길을 말한다. 수몰. 동문-가(東門街)【길】→ 동문거리. 동문-거리 [동문가]【길】 읍리에 있던 길. 옛 청풍부 동문이 있었음. 수몰. 맹꽁이못【못】팔영루 옆에 연곡리 방향으로 1정보 가량의 큰 연못이 있었다. 수질오염으로 고기가 살지 못함. 수몰. 명월정터¹(明月亭-)【터】→ 금병헌 터. 명월정터²【터】明月亭은 寒碧樓 동쪽에 있었다 함. 수몰. 버들구미나루【나루】→ 평등나루. 부사 선정비(府使善政碑)【비】아래에 있는 청풍부사 김창협(金昌協), 김이탁(金履鐸), 김광욱(金光煜), 홍중주(洪重疇), 김수증(金壽增), 안광묵(安光?), 민영학(閔永學) 등의 선정비.1983년 청풍문재단지로 옮김. 북창나루【나루】읍리와 북진을 연결하는 나루이다. 청풍부의 세곡 창고인 북창이 북진의 강안에 소재하여 나루터는 번창했다고 한다. 수몰. 사미도(蛇尾島)【고분】 사미도는 한벽루 아래에 있다. 파강 위의 형세가 뱀꼬리와 같고 범인을 안치한 신담을 말한다. 수몰. 상-리(邑上里)【마을】읍내 맨 위쪽에 있던 마을. 수몰. 새마을【마을】1972년 대홍수로 수재민이 발생하여 읍상리 본동에서 남향으로 300m 지점에 새마을을 형성하였다. 수몰. 샘물【샘】읍리 주민은 식수와 생활용수를 물지게에 초롱으로 강물을 길어다가 사용했다. 강바닥 깊이까지 약 30m 토층에서 지하수를 퍼 올린 유일한 식수원. 수몰. 서래정터(棲來亭址)【터】청풍관의 건물 후면에 부착한 팔각정은 한강에 접하였다. 수몰. 솔무정(松茂亭)【나무】조선시대 청풍부 관아에서 신담의 江岸을 따라 광의리 송무정(설무정)까지 소나무 를 식재했다고 한다. 수몰. 쇄필방지【터】 쇄필방(鎖匹房)은 3간이다. 삼문을 통과하여 들어 왔을 경우 곧바로 접하게 되는 곳으로 발굴 중 많은 짐승의 이빨이 출토된 곳. 수몰. 수둔물【샘】남산 동쪽에서 솟는 샘물로 읍상리 주민이 식수로 이용했다. 수몰. 숲-밖【들】→중들. 숲-안【마을】→ 중리. 숲거리【길】팔영루에서 연곡리로 가는 길을 ‘숲거리’라고 부르고, 길가에 수십 그루의 느티나무가 식재되어 팔영루 안쪽을 ‘숲안에’, 광의리 쪽으로 ‘숲밖에’라고 불렀다. 일제시대 갈짐을 뜯어올 정도로 숲이 우거졌었다. 수몰. 신-담【마을】하리 서북쪽에 있는 마을. 구렁을 메우고. 새로 담을 쌓아 마을을 이루었다 함약 280여년전 함지가 되었던 곳을 메운곳으로 새로 담을 쳤다하여 ‘신담’이라고 불리었다. 수몰. 신담 적석총【고분】읍하리 북서쪽 청풍초등학교 뒤쪽에서 약 200m 아래 신담은 1982년 충북대학교에서 발굴한 유구의 장타원형 석축부분은 길이 95m, 폭 30m로 강쪽을 향한 경사면은 정상에서 55m로 3개의 굴곡이 층계를 형성하였다. 고려시대 철제가위, 장식금구, 동전, 무문토기편에서 삼국기의 토기, 도기편, 자기편, 조선시대의 유물까지 혼합되어 출토되었다.수몰. 양수장【시설】 읍리는 수원이 부족하여 각 가정이 물지게로 강물을 길어다가 먹었다. 1963년경 한벽루 아래쪽 江岸에 양수장에서 강물을 끌어 올려 남산에 취수장을 치하고 상수도를 개설하여 식수를 공급했다. 수몰. 어문개여울【여울】 읍상리 양수장 앞강의 여울을 말한다. 언덕집【주점】 병기창고 터가 소재한 주점으로 일명 청풍관이라 한다. 수몰. 엄봉익공덕비【비】1974년 6월 청풍국민학교 입구에 세운 공덕비(1.5m×54㎝×21.5㎝)는 지금 청풍초등학교에 있다. 후면에 “선생은 청풍의 등불이로다 고장을 살찌우기에 항상 발길이 바빳나니 이 고장 넓은들에 굳건히 닦아 놓은 배움의 전당 선생의 공 길이 빛나리 청풍의 새싹 용문을 달리리”라고 수록했다. 연당【못】 한벽루 앞에 연못이 있었다고 전한다. 수몰. 엽연초생산조합지소【조합】 읍하리 농협창고에서 황색엽연초를 수매하는 사무소와 보관창고가 있었다. 수몰. 영어터(囹圄址)【터】 청풍부 관아에 내옥은 3간이다. 외옥은 팔영루에서 한강쪽으로 북동향에 둥글게 외곽을 두른 안에 ‘囹圄’의 글씨를 수록했다. 수몰. 완행버스정류장【정류소】 읍상리 금남루 입구에 소재했었다. 제천과 충주간을 운행한 완행버스는 황석나루 찻배를 도선하여 읍리 정류소를 경유한 충주행은 한수와 덕산을 왕래했다. 수몰. 왜병터거리【묘】 본래 읍하리 청풍중고등학교의 교정을 ‘왜병터거리’라고 불렀다. 또는 어린이가 죽으면 묻는 ‘애장터’라고 한다. 수몰. 우석광업소【광산】 일제시대 망월산(336m)에서 채광하였다. 광산의 명칭은 사업주가 변경되면서 구메중석광산, 삼욱광업소, 우석광업소라 하였다. 성수기에 70명의 광부가 2개의 광구에서 교대로 채광함. 亞鉛과 銅을 분리하여 논산 장흥재련소에 운반하였고, 형석은 96%로 분쇄하여 도자기 공장에 판매하였다. 웃장터【장】 금남루 앞에 공터에서 5일장을 개시함. 수몰. 읍(邑)【마을】→ 읍리. 읍-상리(邑上里)【마을】→ 상리. 청풍면사무소에서 남동쪽에 위치한 읍상리는 평동?본동?새마을 등 3개 자연부락으로 나뉘었다. 수몰. 읍-진(邑津)【나루】→ 읍리나루 읍내(邑內)【마을】→ 읍리. 읍내장【장】 읍내장은 3일과 8일 관문 밖에서 개시하였다. 북면의 안음장은 1일과 6일에 개시하였는데, 관문에서 거리가 10리이다.수몰. 읍리-나루 [읍진]【마을】 읍리 앞에서 교리로 건너는 나루.일명 청풍나루로 불리며, 1975년 20m 길이의 선착장을 설치하였다. 수몰. 읍리마을회관【시설】 1972년 읍상리에 27평 규모의 마을회관을 건립했다. 수몰. 읍중-리(邑中里)【마을】→ 중리 읍창 터[邑倉址]【터】하리 서남쪽에 있는 터. 옛 청풍현에 딸린 창고가 있었음. 수몰. 읍평루 터(揖枰樓-)【터】객사터 남쪽에 있는 읍평루의 옛 터. 수몰. 읍하-리(邑下里)【마을】→ 하리. 응벽루지(凝碧樓址)【터】응청각 남쪽에 있는 응벽루 터. 응벽루는 한벽루 북서쪽에 있다. 수몰. 응청각 터(凝淸閣-)【터】읍내에 있는 응청각 터. 조선 중종(中宗) 때 이 퇴계(李退溪)가 단양 군수로 왔을 때 지은 ‘연궁응청향(燕窮凝淸香)의 글귀를 따서 응청각이라 하였다 함. 1981년 5월 1일 지방유형문화재 제90호 지정, 1983년 청풍문화재단지로 이건하였다. 수몰. 의천각 터(義泉閣-)【터】한벽루와 동헌 사이에 있는 터. 고을을 찾아 온 손님을 맞이하던 의천각이 있었음.수몰. 의천루지(義泉樓址)【터】동문거리에 있는 의천루의 터.동문거리는 옛 청풍부 동문에 있었음. 수몰. 이부사-비(李府使碑)【비】금남루 앞에 있는 청풍부사 이후산(李後山)의 애민선정비.1985년 ‘李後山愛民善政碑’(1.5m×66×18.5㎝)는 청풍문화재단지로 이전했다. 수몰. 인지-산(因地山)【산】읍내 남쪽에 있는 산. 옛 청풍 고을의 뒤가 됨 수몰. 잠업공판장【창고】→ 건견장. 절밭[逸名寺址]【터】→ 평등사지. 제천경찰서청풍파출소(堤川警察署淸風派出所)【행정】 1914년 4월 10일 청풍주재소를 설치하여 청풍군 관아의 내아 18칸에 순사주재소로 사용하다가, 대동아전쟁 때 팔영루 아래 읍리 266번지 2호로 이전했다. 일제하 35년간 존속한 주재소는 해방되면서 청풍지서를 설치하였다. 1984년 구지서 수몰로 청풍면 물태리 133-8호에 옮김. 364평의 부지에 건평 35평의 시멘트 벽돌조 슬라브 청사. 중-뜰 [숲밖]【들】읍중리 앞에 있던 들. 중-리(中里) [읍중리, 숲안]【마을】읍하리와 읍상리 사이에 있는 마을. 울창한 숲이 있었는데 그 안이 됨. 수몰. 중들 신작로【길】광의리에서 팔영루까지 1㎞ 구간에 중들을 가로지른 비포장 신작로는 좌우에 미류나무가 있었고, 등하교 시간에 자전거로 통학하는 학생이 많았다. 수몰. 지당(池塘0【못】→ 남창못. 창천여울[蒼川灘]【여울】한벽루 앞강에 북진나루 사이에 ‘창천여울’이라 한다. 이 여울의 중심에 뗏목이 걸리지 않게 뗏골목을 만들어 띠배꾼에게 통행료를 받았다고 한다. 수몰. 천씨 자선비(千氏慈善碑)【비】읍내에 있는 천인봉(千仁鳳)의 자선비. 1939년 흉년에 많은 돈을 내어 빈민을 구제하였으므로 그의 자선을 기념하여 1941년 세움‘千仁鳳慈善紀念碑’(1.2m×43.5×15.5㎝)는 청풍문화재단지로 이전하였다. 천주교공소(天主敎公所)【교회】해방후 읍리에 있었다. 물태리 133번지 110호로 이전했다. 청풍-장(淸風場) [읍장]【장】읍내에서 3일과 8일 열렸던 5일장. 청풍장터는 해방후 청풍면사무소 아래 읍내에서 5일장을 開市하였다. 수몰. 청풍감리교회【교회】읍리 189번지 2호에 감리교회가 있었다. 물태리 133번지 110호로 이전했다. 청풍강【내】한벽루 아래로 흐르는 강물의 굽이가 파(巴)자의 형세로 ‘巴江’이라 한다. 한강의 명칭이 생기기 전에 ‘청풍강’이라 하였다. 수몰. 청풍고등학교터(淸風高等學校)【학교】읍하리 268번지에 소재했었다.1969년 5월 10일 청풍상업고등학교 개교, 1974년 3월 1일 청풍고등학교로 개편, 충주댐 수몰로 1984년 9월 6일 청풍중학교와 함께 제천시 청풍면 읍리(물태리) 산6번지에 교사를 신축 이전, 1997년 2월 13일 제26회 졸업식을 종말로 1,458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폐교되었다. 청풍관(淸風?)【고적】응청각 측면에 소재한 객관이다. 1669년 부사 이상일이 중수하고, 송시열 선생이 1670년 청풍관중소기(淸風?重修記)를 썼다. 청풍관을 政堂으로 지칭한 금병헌으로 전도되어 1976년 12월 23일 지방유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 1983년 청풍문화재단지로 이건하였다. 수몰. 청풍나루1【나루】한벽루 위에서 약 500m 위에 읍상리와 교리를 도선하는 나룻배는 60~70명이 乘船하였다. 강폭은 약 250m로 여울이 심하고 수심이 얕아서 나룻배는 삿대를 이용하고 수량이 많으면 노를 저어서 도선하였다. 나룻배는 교리의 학생이 통학하고 주민은 땔감을 팔러 청풍장에 가고, 읍리 주민은 나무를 하려고 渡船했다. 뱃삯은 모곡제로 봄에 보리쌀 1말, 가을에 벼 1말을 도선공에게 주었다. 수몰. 청풍나루2【선착장】제천시내에서 24km 지점에 청풍면 읍리 39번지 4호에 있다. 충주관광선 청풍나루휴게소 선착장이라 칭한다. 선착장 바지(BARGE)선은 1987년 7월에 진수, 재원은 무게 677톤, 길이 41.28m, 너비 15m, 물속에 잠긴 깊이 2m이다. 선착장은 2층으로 아래층은 매표소, 휴게실, 기념품점, 매점, 스낵코너, 화장실 등이 있고 2층은 음식점이다. 생활용수는 바지선 아래 탱크에 저장후에 제천위생사가 수거해 간다. 바지선은 '장회나루호'로 처음에 1987년 장회나루에 있었으나 썰물이 심하여 1989년 청풍대교 밑으로 이전하여 2년간 정박했으나 물살이 심하여 1991년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였다. 청풍농지개량조합(淸風農地改良組合)【조합】읍리 316번지에 농지개량조합이 있었다. 수몰. 청풍농촌지도소(淸風農村指導所)【행정】邑里 373번지에 소재했었다. 1963년 6월에 개설하여 농민의 소득증대를 위하여 농업기술을 전수시켰다. 수몰. 청풍단위농협(淸風單位農協)【조합】읍리 367번지에 소재했었다. 1914년 설립한 농업협동조합지소는 이단위 협동조합으로 1969년 12월 면단위로 통합하여 청풍단위농협이 되었다. 수몰후 물태리 133-13호로 이전하고 청풍 수산 덕산 한수농협이 병합되면서 ‘남제천농협청풍지소’가 되었다. 청풍대교(淸風大橋)【다리】청풍호에서 가장 협곡이 좁은 쌍암산 저성과 망월산 강안의 반석에 청풍대교(길이 315m, 폭 10m, 높이 63.94m)를 시공하여 597번 지방도로가 통과한다. 청풍면사무소(淸風面事務所)【행정】1904년 10월 10일 설립한 이래 사무소를 수차례 옮겼다. 일제하에 금남루 건너편 민병덕씨 집에 소재했다. 두번째 해방후 읍하리 팔영루 아래로 면사무소를 이전했다. 세번째 읍하리 제천엽연초생산조합의 주재기사의 사무소에 소재하다가 읍리 203번지 1호에 청풍국민학교 터를 매입하여 수몰전까지 소재하다가 수몰로 1984년 읍리 133번지로 이전하였다. 청풍보건지서【의료】일제시대 읍상리 189번지에 소재했다. 公醫가 외과, 내과 등을 진료하다가 해방후 보건소가 신축되면서 1960년경 폐업.. 수몰로 1984년 물태리 133번지로 이전 청풍상업고등학교(淸風商業高等學校)【학교】→ 청풍고등학교. 청풍석조여래불상(淸風石造如來佛立像)【불상】읍리 650번지에 소재했던 나말여초의 여래석불(전고 3.33m)은 평동 대광사(평등사) 입구에서 100m 하류의 강안에 북동쪽 강을 정시하였다. 석불에서 3m 떨어진 곳에 연화대좌가 있었다. 1971년 7월 7일 보물 546호로 지정, 1983년 청풍문화재단지로 이운하여 불상각을 지어서 연화대좌에 석불을 안치했다. 수몰. 청풍양조장(淸風釀造場)【양조】읍리 366번지에 있던 막걸리양조장. 수몰. 청풍우시장【장】읍하리 농협창고 옆에서 청풍장날 우시장에서 10~15마리가 매매되었다. 수몰. 청풍우체국【행정】청풍면 읍리 230번지 5호에 소재했었다. 1911년 3월 20일 청사를 신축 청풍우편소를 개국, 1941년 2월 1일 청풍우편국으로 개칭, 1949년 11월 5일 청풍우체국으로 개칭, 1962년 5월 18일 청풍우체국 금성분국을 개국하여 업무의 영역을 확장시켰다. 1966년 12월 23일 청사를 개축했다. 각 리에 전신전화 취급소를 설치하였다. 수몰로 1984년 6월 읍리 133번지 4호로 이전하함 230㎡에 공중실 48㎡, 현업실 30㎡, 집배실 16㎡, 기타 136㎡의 청사에서 예금, 보험, 우편환, 집배, 배달 등의 체신업무를 보고 있다. 청풍중학교(淸風中學校)【학교】청풍면 읍리 268번지에 소재했었다. 청풍중학교 설립은 초대도의원 김경(金鏡)씨가 주선하여 각 부락의 무연고 땅을 기부체납을 독려한 기금으로 설립했다고 한다. 1953년 3월 23일 청풍공립중학교 설립인가, 1953년 5월 10일 청풍공립중학교 개교, 충주댐 수몰로 관내 12분이 재산을 헌사한 기금을 토대로 1984년 제천시 청풍면 물태리 산6번지 23,143㎡(운동장 11,695㎡, 건물 1,977㎡, 정원 9,471㎡)의 부지에 校舍를 신축 이전하였다. 1988년 2월 13일 청풍중학교 제44회 졸업식을 종말로 5,700명을 배출하고 1998년 3월 1일 제천중학교 청풍분교가 되었다. 청풍초등학교【학교】처음은 청풍군 읍내면 중리에 류영기(柳榮基) 설립함. 1909년 8월 21일 영명학교 인가, 영명학교는 청풍관아의 향장청 10칸과 곽사 4칸을 교실로 사용, 금남루를 교문으로 사용하였다. 1912년 5월 27일 청풍공립보통학교 인가, 1941년 4월 1일 청풍국민학교로 변경하였다.1970년 12월 24일 청풍면 읍리 202번지에 신축 이전하였다. 충주댐 수몰로 1984년 8월 16일 청풍면 물태리 산22-2로 이전하였다. 청풍향교터【터】청풍향교는 남산의 산록에 있었다. 청풍부사가 새벽에 일어나자 개가 교리를 향하여 짖어서 보니까 무지개가 서려서 길지라 생각하여 이건했다고 한다. 수몰. 청풍호(淸風湖)【호수】1985년 10월 17일 충주댐 준공으로 호수의 총길이는 97.2㎞(제천 42㎞, 충주 28.7㎞, 단양 20.5㎞)에 이른다. 충주댐의 명명으로 ‘충주호’라고 칭하나, 청풍에 담긴 호수이니 ‘청풍호(淸風湖)’라고 칭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청풍호로 통용되고 있다. 청풍호반 수경분수【분수】청풍호반 수경분수는 淸風明月의 本鄕에 淸風官衙가 소재했던 水面에 위치한다. 2000년 4월 15일 청풍명월제 개막시 가동한 이동식 바지선(16m×14m×3.5m) 디젤엔진연료탑재방식의 수경분수는 매년 4월~11월, 1회 18분씩 계절, 요일, 주간별 차등제로 운영, 평일 4~5회, 공휴일 5~6회 가동한다. 고사분수는 높이 150m(최고 162m)로 150만명의 충북도민 상징, 주간의 연출로 태양과 활력을 상징하는 동시에 15만명의 제천시민을 상징한다. 진달래 조형물은 청풍호반의 이미지를 표현, 담홍색의 진달래 꽃잎 문양(D=25m)의 분수 5개는 음양오행을 의미하여 만물이 청풍에서 화합함을 상징한다. 보조분수인 안개분수 50조는 청풍호반의 새벽을 여는 안개를 상징한다. 고사분수 주변에서 육상 원격제어 3개의 조명 스페이스케논, 투광등, 광섬유 등의 광선(레이저)은 충주호의 수역을 공유하는 충주-제천-단양의 3개 시군이 청풍에서 하나된 힘으로 화합하는 것을 의미하며 조명은 야간에 연출하여 은은한 달과 조용한 청풍의 야경을 상징한다. 충주댐수몰대책사무소【행정】 읍리 373번지 6호에 제원군출장소가 있었다. 수몰. 토지개량조합지소(土地改良組合支所)【조합】1947년 12월 15일 설립하여 평동 아래 수리조합과 양수장 사무소를 설치하여 관개수리하여 중들에 논농사를 경작하였다. 통벽헌지(通碧軒址)【터】한벽루 서쪽 측면에 있다. 파-수(巴水)【내】한벽루 밑으로 흐르는 내. 물 굽이가 파(巴)자처럼 되었다 함. 팔영루현덕성문(覽德城門)【고적】팔영루에 읍성의 성문을 말한다. 성문은 방형으로 제형이며 천정에 범그림은 청풍고을의 수호신 역할을 했었다. 1983년 청풍문화재단지로 이건. 팔영루 사적비(八詠樓事蹟碑)【비】팔영루의 앞에 있는 사적비. 이 비(95×37.5×16㎝)는 1983년 청풍문화재단지로 이전하였다. 팔영루(八詠樓) [현덕문]【고적】읍리 286번지에 소재했었다. 읍하리 서쪽에 있는 정자. 조선 숙종(肅宗) 28년(1702)에 청풍 부사 이기홍이 창건하고, 고종(高宗) 7년(1870)에 청풍 부사 이직현이 고침. 그 후 민치상이 여덟 시를 짓고 ‘팔영루(八詠樓)’라는 현판을 써서 붙임1976년 12월 23일 지방유형문화재 제35호로 지정, 1983년 청풍문화재단지로 이건하였다. 평-동(坪洞)【마을】읍상리 동남쪽 평지에 있던 마을.청풍면사무소에서 강변을 따라 1.5㎞ 상류이다. 이 마을은 자가발전 시설로 전기를 사용했으며 뒷산의 용출수로 상수도를 이용했다. 평동은 형풍 곽씨 11가구, 이씨, 김씨가 각 1가구로 곽씨의 집성촌이었다. 평등-사(平等寺)【절】읍하리에 있던 절. 평등사는 해방후 읍리에 노재철, 전창옥, 곽상옥씨가 시주하여 창건했다고 한다. 평등나루【나루】청풍대교(높이 56m) 아래 학현리 입구에 있었던 평등나루는 버드나무가 많아서 일명 ‘버들구미나루’라고 한다. 읍상리 평등과 학현리를 연결하는 나루이다. 평등리(平等里)【마을】→ 평동. 평등사지(平等寺址) [逸名寺址?절밭]【절터】읍상리 평동 4, 5번지 과수원 절터를 1982년 단국대학교에서 발굴하여 법당의 건물지를 확인, 삼국시대의 와편이 출토되었다. 특히 백제의 납석제체불보살병립상(蠟石製佛菩薩竝立像)(16.2㎝)의 출토지를 확인하여 국립청주박물관에 보존하고 있다. 이 절터의 원적지로 확인된 청풍석조여래불입상(淸風石造如來佛立像)과 연화대좌는 대광사(平等寺) 입구에 있던 것을 1983년 청풍문화재단지로 옮겼다. 포수청지(砲手廳址)【터】한벽루에서 남쪽으로 관문 밖에 군기고에서 약간 떨어진 남서향의 중리에 있었다. 하리(下里) [읍하리]【마을】읍내 아래쪽에 있던 마을 읍하리는 상권을 형성한 하리말, 신담, 새마을의 3개 자연부락이다. 하마비(下馬碑)【비】하마비는 읍상리 양수장 수로하의 길가에 大小人員皆下馬碑(95×37.5×16㎝)가 격강의 청풍향교를 향하여 있었다. 1983년 청풍문화재단지로 이전하였다. 학소암(鶴巢巖)【바위】평동의 상류 진도나루 하류에 망월산 하에 굽이진 삼지탄의 급류로 뗏목이 바위에 흐트러져 목숨을 잃기도 하던 곳으로 강 중심에 솟은 바위를 ‘鶴巢巖’이라 하며 일명 ‘치마빈장’이라 한다. 이곳에 옛날에 이심이가 살았는데, 진목리 정지말고개 앞강에 딱지소 이심이와 1년에 한번씩 만났다고 전한다. 수몰. 한기수기념비(韓麒洙記念碑)【비】한기수 금융조합장 근속 기념비는 1934년 청풍 읍리에 세운 비로 수몰로 1984년 읍리 133번지 113호 남제천농협청풍지소 앞에 옮겨세웠다. 한벽-루(寒碧樓)【고적】 읍리 203번지 1호에 소재했었다. 읍상리 북쪽, 지금의 청풍국민학교 안에 있는 정자. 높은 석벽위에 세워졌는데, 정자 밑으로 한강이 유유히 흐르고, 강건너 백사장이 깔려 있으며, 금수산이 솟아 있어 경치가 아름다움.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 왕사 청공(王師 淸恭)이 고향이 청풍 군수로 부임하여 세운 절에서 쓰던 것이라는데 그 뒤 오래되어 헐어진 것을 조선 태종(太宗) 6년(1406)에 군수 정수흥, 인조(仁祖) 12년(1634)에 군수 권경기, 고종(高宗) 7년(1870)에 부사 이직현이 고침. 1971년 8월 1일 보물 제528호로 지정, 1983년 청풍문화재단지로 이건하였다. 행곡【골】청풍문화재단지 향교 아래 골짜기는 물태리의 지경으로 사람이 많이 왕래한다는 뜻으로 청풍면 관내의 문화재가 이전한 以來 行人이 많이 다니는 행골이 되었다. 향장청지(鄕長廳址)【터】한벽루에서 남쪽으로 군기고에서 약간 떨어진 서쪽에 있었다.수몰. 현덕문(賢德門)【고적】→ 팔영루 협동조합정미소【정미소】읍상리와 읍하리에 있었다. 수몰. 회화나무【나무】읍상리 우체국 옆에 회화나무가 있었다. 일명 ‘훼나무’라고 불렀다. 충북의 보호수로 지정한 약 5백년 수령의 노거수로 나무를 베면 해를 입는다고 전한다. 수몰. 훈련청지(訓練廳址)【터】군기고에서 남쪽으로 원남면 지역에 있었다 수몰.

장선리(長善里)

[장선]【리】 본래 청풍군 수하면(水下面)의 지역으로서, 긴 골짜기 안이 되므로 장선 또는 장선리(長善里)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제천군 수하면에 편입되었다가, 1929년 10월 14일 청풍면에 편입됨. 1980년 4월 1일 제천시 시승격에 따라 제원군 청풍면 장선리가 되었다가, 1995년 시군통합으로 제천시 청풍면 장선리가 됨. 충주 댐 수몰 시 청풍면 유일의 잔존 리동이 됨. 달랑-고개¹ [월령, 달령고개]【마을】 달랑고개 밑에 있는 마을. 달랑-고개²[월령, 장선티, 장선현]【고개】장선 서북쪽에서 봉양면 구곡리로 가는 높은 고개. 달령-고개【마을】→ 달랑고개. 병산-골【골】 줄병산에 있는 골짜기. 병산-영당(屛山影堂)【사당】 금병골에 있던 사당. 1947년 덕산면 용화리에 창건하여 주자(朱子)와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의 영정을 봉안하고, 의당(毅堂) 박세화(朴世和), 회당(晦堂) 윤응선(尹膺善)을 추배하였는데, 1951년8 이곳 장선리로 옮김. 1994년 5월 금성면 사곡리로 옮김. 병풍-골【골】줄병 바위가 있는 골짜기. 뽕나무-거리 [뽕나뭇골, 상가]【마을】 장선 남쪽에 있는 마을. 뽕나무 밭이 많았음. 뽕나뭇골【마을】→ 뽕나무거리. 상-가(桑街)【마을】→ 뽕나무거리. 어리-곡(於里谷)【마을】→ 어리실. 어리-실 [어리곡]【마을】뽕나무거리 북쪽에 있는 마을. 월-령¹(月領)【마을】→ 달랑고개. 월-령²(月領)【고개】→ 달랑고개. 유병산-석실(幽屛山石室)【굴】 줄병풍바위에 있는 굴. 두간 방처럼 되고 중간에 사잇 문이 있어서 위 아랫방이 됨. 장-선(長善)【마을】→ 장선리. 장선-령(長善領)【고개】→ 달랑고개. 장선-티(長善峙)【고개】→ 달랑고개. 장선-현(長善峴)【고개】→ 달랑고개. 줄병-산(茁屛山)【산】 장선 위쪽에 있는 산. 병풍을 쳐 놓은 것처럼 석벽이 빙 둘러 있음. 줄병풍-바위【바위】 병풍골에 있는 바위. 석벽이 병풍처럼 둘러섰고, 석실이 있음.

진목리(眞木里)

진목리(眞木里) [진목?진목재?참나뭇골]【리】진목리는 청풍면으로 면소재지 읍리에서 격강에 서남서(250도)향으로 관문인 팔영루에서 광의, 계산, 양평리 뒤들나루를 도선하여 마을까지 약 6.8㎞ 지점에 소재했었다. 진목리는 북동쪽으로 약 1.5㎞ 상류에 방흥리, 격강의 동쪽에 양평리, 격강의 남쪽에 한수면 황개, 서쪽에 한수면 호운리, 북쪽으로 약 750m에 오산리와 인접하였다. 강안에 위치한 진목리는 북향의 오산리 골짜기에서 계곡물이 흐르고 마을의 북쪽 에 뒷산은 해발 367.6m의 산을 등지고, 동쪽으로 남한강이 흘러서 강안에 층적토를 이루며, 서쪽으로 호운리와 경계를 이루는 능선에 둘러 있어 북서풍을 차단할 수 있고, 남쪽으로 한강물이 흐르는 배산임수지이며, 남쪽 격강에 엄성벼루가 있어 외세의 공격을 차단하며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지세이다. 1935년 진목리 격강의 엄성벼루에 충주~청풍간 지방도로의 개설로 진목나루를 건너 황개에서 완행버스를 타고 제천과 충주를 통행하고, 학생들은 양평국민학교와 청풍중고등학교를 통학했다. 충주댐 수몰로 전동이 수몰되어 금성에서 강안의 호수변에 532번 지방도로를 따라 오산리에서 옛 진목리 수몰 마을의 위치를 볼 수 있다. 진목리는 조선시대 청풍부 수하면 진목정리(眞木亭里)였는데 1913년 12월 29일 군면폐합에 따라 청풍군이 제천군에 통폐합됨으로 동년 제천군 수하면 진목리가 되었다. 수하면 사무소가 방흥리에 소재하여 江北의 동리를 광역적으로 다스렸으나 일제시대 진목리에 수하면사무소와 주재소를 신축하여 이전하고 행정구역을 축소한 9개리 후산(後山里), 장선(長善里), 사오(査五里), 부산(婦山里), 황석(黃石里), 단돈(丹頓里), 오산(伍山里), 방흥(芳興里), 진목(眞木里)를 다스다가 1929년 11월 1일 수하면 북부지역의 9개리가 청풍면에 이속 편입하여 동년 제천군 청풍면 진목리가 되었다. 1980년 4월 1일 제천시의 시승격에 따라 시?군이 분리되면서 제원군 청풍면 진목리가 되었다. 진목리는 마을이 번성할 때 156가구가 거주했으며, 수몰 당시 안말 20호, 새터말 23호, 주막거리 13호, 갈골 8호가 벼, 보리, 콩, 수숙, 수수 등을 경작했다. 1985년 충주댐 수몰 마을로 이주민이 발생하면서 진목리의 법정리는 현존하지만 행정구역은 부산리에 편입되었다. 갈골[葛谷]【마을】본동에서 북서쪽에 소재한 진목리 3반의 자연부락으로 7가구가 살았었다. 마을에 칡이 많다고 하여 ‘갈골’이라 한다. 갈골에서 하류로 2㎞ 지점에서 충주시 동량면 만지리로 가는 초입이며, 큰길로 충주시 동량면 지동리로 가는 길로 제천시와 충주시의 市경계이다. 일부 수몰. 갈골동굴【굴】갈골 앞산 동쪽의 중턱에 지름 3m 가량의 석굴에 종유석이 있었고, 박쥐가 살았다. 전래설에 베틀을 짜던 자리가 있었고, 뱀의 머리가 지름이 약 20㎝ 되는 이무기가 살았다고 전한다. 현재 석굴은 붕괴되었다. 검은돌[장수바위]【고인돌】정지말고개에서 임진왜란 때 일본인이 장수가 태어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지혈을 누르던 바위라 전하여 ‘장수바위’, 돌이 검다고 하여 ‘검은돌’이라 한다. 이 돌은 ‘진목리 2호 고인돌’로 명명한 덮개돌로 정지말고개의 전설에 혈을 지르고, 지형을 누르던 바위와는 무관한 선사인이 새긴 성혈이다. 수몰. 고인돌【고적】1982년 한양대학교에서 정지말고개(진목고개)에서 강쪽으로 능선을 따라 일렬로 배치한 7기의 고인돌과 새터에서 1기를 발굴하였다. 고인돌의 부장품은 일체 없었으며, 江岸에서 상류에서 떠내려온 유물을 수습했다. 유적지 수몰. 곱돌광산【광산】갈골에 곱돌광산에서 활석을 화장품 원료로 채석했으나 참곱돌은 거의 없고 개곱돌 뿐이어서 수몰전에 폐광했다. 군두막재[軍頭幕峙]【고개】양평리로 도선하는 뒷들나루 뱃터에 뱃사공 한집이 살면서 오산리, 진목리의 학생들을 양평국민학교로 도선시킨 뱃터를 ‘뱃나들이’라 하며, 뱃터에서 오산리로 가는 고개를 ‘군두막재’라고 한다. 일부 수몰. 길목재【고개】→ 정지말고개. 높은자리【산】진목리 뒤산을 말한다. 현재 공동묘지가 있다. 닥앞소【고개】→ 당앞소. 당앞소(沼)【소】진목나루 밑에 뗏목을 정박한 곳으로 수심이 깊고 물살이 없어서 인근 산에서 벌목한 나무를 강안에서 뗏목을 엮었던 곳으로 일명 ‘당앞소’라고 한다. 수몰. 덜겅벼루【벼루】엉성벼루 진목마을 앞 강건너 벼루이며 제천 청풍에서 항강을 거쳐 충주로 잇는 지방도로가 있음. 뒷골재【고개】진목리에서 갈골로 넘어가는 고개로 컴컴하다고 하여 ‘뒤골재’라 한다. 딱지소(沼)【소】진목쟁이 앞강에 소용돌이 소는 직경이 약 80m로 수심은 명주실 한타래가 다 풀릴 정도로 깊다고 전한다. 이 沼는 80~90㎝ 크기의 잉어와 눈치, 황쏘가리 등의 대어가 서식했다. 1980년경 남포를 터뜨려서 각종 물고기를 잡았다고 한다. 이 소는 수온이 차서 한여름에 목욕을 하면 한기로 수지비를 끓여서 먹었다고 한다. 딱지소를 지나 여울이 지면서 진목나루를 지나 당앞소에 이른다. 수몰. 뱃나들이【나루터】→ 군두막재. 범대미【고개】→ 정지말고개. 벼락바위【골】딱지소 아래 벼락을 맞은 돌이라 하여 '벼락바위'라 한다. 수몰. 산지당골【고개】안말에서 동쪽의 골짜기를 말한다. 일부 수몰. 살여울【여울】진목 앞 남한강류이며 누치가 많기로 이름남 새터말[새터]【마을】1972년 대홍수 때 본동의 안말에 거주하던 주민들의 가옥이 유실되어 고지대에 새로 조성한 마을로 23호가 거주했었다. 수몰. 생들기【들】→ 진목들. 수하면-터(水下面-)【터】 진목리에 있는 수하면의 터. 본래 청풍군의 지역으로서, 옛 청풍읍 앞으로 흐르는 강물의 아래쪽이 되므로 수하면이라 하여 장선(長善), 사오(査伍), 단돈(丹頓), 후산(後山), 황석(黃石), 방흥(芳興), 오산(伍山), 진목(眞木), 사기막(沙器幕), 호운(好雲), 명오(鳴梧), 오초전(烏椒田), 포탄(浦灘), 서운(瑞雲)의 14개 동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후산, 장선, 사오, 부산, 황석, 단돈, 오산, 방흥, 명오, 진목, 사기, 호운, 서운, 함암(咸岩),포탄의 15개 리로 개편 관할 하였는데, 1929년 10월 14일 면을 폐지하고 후산, 장선, 사오, 부산, 황성석, 단돈, 오산, 방흥, 진목리는 청풍면으로, 나머지 명오, 사기, 호운, 서운, 함암, 포탄리는 한수면에 편입됨. 아랫오미【마을】→ 진목리. 안말1【골】딱지소 벼락바위에서 북쪽으로 안쪽 골이 깊다하여 ‘안말’이라 한다. 지금은 ‘벼락골’이라 한다. 안말2【마을】강안쪽에 마을이 있다하여 ‘안말’이라 한다. 안말은 진목리 본동으로 1972년 대홍수로 가옥이 침수되어 새터말로 이건하여 14호가 거주했었다. 수몰. 엄성천(嚴城遷)[엄성벼루]【벼랑】진목리 격강에 제일강산은 한수면과 청풍면의 경계로 산허리를 가르는 신작로 아래 강쪽에 벼루를 엄성천이라 한다. 엄성천→엄성벼루→엉성벼루로 변천하였다. 1935년 강안의 험준한 절벽에 개설한 도로는 제천과 충주간에 가장 험준한 코스로 강건너 진목리에서 볼 때 가장 높은 커브지점은 ‘가는골’은 신작로에서 강바닥까지 무려 150m에 이른다. 수몰후 도로는 갈수기에 일부 드러난다. 장수바위【바위】→ 검은돌. 장수혈암(將帥穴岩)【고인돌】선녀가 하산하여 목욕하고 물을 마셨다는 옥녀봉의 능선은 진목리 정지말고개를 거쳐서 강물에 드리우며 작은 산봉우리의 형세를 이루어 장수가 태어난다는 길지라 하여 일제는 강가의 산허리에 쇠말뚝 세개를 박고 돌을 얹어 놓았다고 한다. 수몰. 정지말고개[범대미·길목재·진목재·진목쟁이]【고개】뒤뜰나루 하류에 굽이진 곳은 마을의 洞口밖 고갯마루에 범이 출현하여 ‘범대미’라 하고 범이 앞을 가려서 발걸음이 멈추었다 하여 ‘정지말고개’라 한다. 또 진목의 동구밖 길목이라 하여 ‘길목재’라 하다가 진목재→진목쟁이로 변천하였다. 수몰. [정지말고개의 전설] 옛날부터 장수가 태어날 고개로 전해지면서 임진왜란 당시 왜병이 이곳에 와 장수가 태어날 자리를 찾아 혈을 지를 때 바위에서 선혈이 솟고 어디선가 백마가 튀어나와 슬피울다 딱지소에 빠져 죽었다 한다. 제자리고개【고개】→ 호운고개. 주막거리【마을】정지말고개 아래 주막거리는 2반으로 8가구가 거주했었다. 주막거리는 소금배와 뗏목이 정박하여 여장을 풀던 곳으로 주모가 있는 객주가 있어 건달과 과객이 흥청되던 곳이다. 수몰. 진목(眞木)【마을】→ 진목리. 진목나루【나루】진목리에서 한수면 황개로 도선하는 나루로 주로 진목리와 오산리 주민이 도선하고, 양평리 주민이 나무하러 왔다. 뱃삯은 모곡제로 여름에 보리 1말, 가을에 벼 1말이나 메밀 1말을 사공에게 주었다. 진목도가【양조장】고 김춘향씨가 막걸리를 주조하여 도매하던 양조장을 말한다. 수몰. 진목들[생들기]【들】 안말에서 강을 나가면서 들판을 ‘진목들’이라 하며, 안말의 앞들에 강물이 돌아서 층적층이 켜를 둘렀다고 하여 ‘생들기’라고 한다. 수몰. 진목재1【마을】→ 진목리. 진목재2【고개】진목 북쪽에서 오산리로 가는 고개. 진목재3【고개】→ 정지말고개. 진목쟁이【고개】→ 정지말고개. 진목정(眞木亭)【정자】옥녀봉 능선 끝자락에 딱지소와 더불어 수려한 곳에 일제시대 면직원 류호열씨가 진목리와 오산리를 담당하면서 건립한 함석지붕의 정자각 ‘진목정’을 말한다. 해방후 도곡리 주민들이 도강하여 정자각에 불을 질러서 진목리 주민이 불을 껐으나 燒失되었다고 한다. 일제는 딱지소가 있는 정자각 등강에 세 개의 혈을 질렀다고 전한다. 수몰. 진목정리(眞木亭里)【마을】조선시대 진목리의 동명. 수몰. 진목지서 터【터】 참나뭇골【마을】→ 진목리 호운(好雲)고개【고개】진목재 서남쪽에서 한수면 호운리로 가는 고개. 안말에서 서쪽 호운리로 넘어가는 고개는 사방이 트여서 시원하다고 하여 ‘제자리고개’라 한다.

학현리(鶴峴里)

[학고개, 학현]【리】 본래 청풍군 동면(東面)의 지역으로서, 학고개 또는 학현(鶴峴)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제천군 금수면(錦繡面)에 편입되었다가, 1917년 금성면에 편입되었는데, 1947년 1월 30일 청풍면에 편입됨. 1980년 4월 1일 제천시 시승격에 따라 제원군 청풍면 학현리가 되었다가 1985년 충주 댐 수몰 마을이 됨. 1995년 1월 1일 시군 통합으로 제천시 청풍면 학현리가 됨. 동금대(東金垈)【마을】→ 학현 동쪽에 있는 마을. 처음에 김씨가 살기 시작하였다 함. 모래-고개 [모래재, 사현]【고개】 학현리 동북쪽에 있는 고개. 모래가 많음. 모래-재【고개】→ 모래고개. 사-현(砂峴)【고개】→ 모래고개. 상-학현(上鶴峴)【마을】→ 학현 위쪽에 있는 마을. 앵이-재 [영아티]【고개】→ 학현 서쪽에서 읍리로 가는 고개. 영아-티 (?兒峙)【고개】→ 앵아재. 중-고개 [중현]【고개】→ 중고개. 중-현(中峴)【고개】→ 중고개 학-고개【마을】→ 학현리. 학-현(鶴峴)【마을】→ 학현리.

황석리(黃石里)

[한똘, 황뜰, 황석, 황도. 황도리, 황두리]【리】 본래 청풍군 수하면(水下面)의 지역으로서, 큰 돌이 있었으므로 한똘, 변하여 황뜰 또는 황석(黃石), 황도(黃道), 황도리(黃道里), 황두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제천군 수하면에 편입되었다가, 1929년 10월 14일 청풍면에 편입됨. 1962년 3월 국립 박물관 고고과장 김정기가 120여 개의 남방식(南方式) 지석묘(支石墓)를 발견하고 20기를 발굴하여 금석 병용기(金石竝用期)의 돌칼, 돌살촉, 맷돌 들을 발굴하였음. 1980년 4월 1일 제천시 시승격에 따라 제원군 청풍면 황석리가 되었다가 1985년 충주 댐 수몰 마을이 됨. 1995년 1월 1일 시군 통합으로 제천시 청풍면 황석리가 됨. 강변 빨래터【빨래터】본동의 정남향 집앞에 강가에 동한기에도 암반에서 온수가 솟고 여름에는 냉수가 솟아서 아낙네의 빨래터가 되었다. 수몰. 고부소[曲沼]【소】황석들 앞에 동서로 흐르는 남한강은 재구미 앞에서 방흥리를 향하여 北西로 회절하고(曲) 수심이 깊어서 ‘고부소’라고 한다. 수몰. 고야말게(高野末-)【들】본동의 자연부락 돌다리 강변에 들이 높다고 하여 붙여졌으며, 모래가 산처럼 쌓여서 일명 '모래등'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120여기 이상의 고인돌이 분포한 지역으로 밭을 갈 때도 돌화살촉 등의 유물이 노출된 선사유적지이다. 수몰. 고야천(古野遷)【강】황석나루 강폭은 넓고 수심이 깊어서 쪽빛에 물고기가 헤엄치는 모습이 보이는 곳으로 ‘고야천’이라 한다. 수몰. 고양이바위【바위】본동 투수골에 고양이가 바위에 자주 올라앉는다 하여 ‘고양이바위’라 한다. 수몰. 고인돌 [지석묘]【고적】황석리에 있는 고인돌. 1962년에 발굴하였는데, 뚜껑 돌 아래에 상자 모양의 돌관(石棺)이 나오고, 돌관 동쪽 끝에서 토기(土器), 돌도끼, 돌칼, 맷돌 들이 나왔는데, 국립박물관에 보존되어 있음. 황석리 고인돌 출토유물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청주박물관, 충북대학교박물관, 서울대학교의과대학, 청풍문화재단지내 제천유물전시관 등지에 산재하여 보존함. 고인돌은 殆半 수몰. 곤실아터[乾率案]【산】本洞에서 북쪽의 뒷산을 말한다. 예로부터 벌목을 금지하여 노송이 많았으나 수몰후에 모두 벌목했다. 일부 수몰. 곱돌광산【광산】 신황석리 마을 동구에 활석층이 분포한 곳의 산하에 활석광산이 있었다. 이곳에서 곱돌광산을 굴착하여 곱돌을 채광했다. 활석은 고온에도 강하여 담배 건조실 바닥의 판돌로 깔았으며, 간혹 참곱돌이 발견됨. 갱구 수몰. 곳집【상엿집】본래 상여는 마을 중심에 있었으나 공동묘지 산하로 옮긴 후에 마을에 액운이 따르면서 다시 원래 있었던 본동으로 이전하였다. 수몰. 공동묘지【묘】본동의 동쪽 대덕산 아래 공동묘지가 있었는데, 문화류씨 이외 산이 없는 타성이나 총각, 처녀, 어린이가 사망하면 매장하였다. 수몰. 공회당【회관】본동의 광장에 1971년 건립한 마을회관, 4H회관, 비료창고 등의 공공건물과 공터를 아울러 공회당이라 한다. 특히 비료창고에서 후산리, 방흥리, 단돈리, 사오리, 부산리, 장선리 등지에서 보관료를 받아서 마을기금으로 사용했다. 수몰. 괴야원소변(槐野員召邊)【길】→ 느티나무거리. 구들벼루【벼랑】황석나루에서 대덕산 아래에 신작로 암벽에 구들장을 뗄 수 있을 정도의 얇은 암반이 낭떠러지기라 하여 ‘구들벼루’라고 한다. 수몰. 구들비리 서낭대【서낭】황석나루 뱃터에서 황석리 본동쪽 강안에서 배를 기다리는 쉼터로 큰바위와 휘추리나무 둘레에 잡석이 쌓여서 ‘서낭대’라고 하였다. 이곳은 서낭제는 올리지 않았으며, 바로 옆에 동쪽에 점술가 방씨 샘터에서 칠석날 칠성제를 지냈다. 수몰. 구들비리【마을】황석나루 江岸에 주택이 5가구가 거주하며 황석나루 선주와 뱃사공, 주점이 있었다. 수몰. 굼애바위【바위】구들벼루에서 금성쪽으로 은행정 못미처 앞강에 솟구친 큰 바위에 물이 휘돌면서 소를 이루어 ‘굼애바위’라고 한다. 수몰. 급수시설【수원지】신황석리 동쪽에 대덕산 제당이 소재한 투수골 상수원 발원지로 계곡물을 이용하여 수도관을 매설하여 급수를 공급받고 있다. 놀음바위【바위】본동에서 초막골로 올라가는 부처바위 조금 위에 넓은 바위에서 밤중에 관솔불을 밝히고 놀음을 했다하여 '놀음바위'라고 한다. 수몰. 느티나무거리【길】 본동에서 서쪽으로 서낭대 8그루 느티나무와 선돌이 있는 2그루 느티나무 사이에 구간을 말한다. 수몰. 당숲【숲】→ 서낭데이. 대덕산[삼방산三方山]【산】대덕산 일명 (三方山在府西隔江數里許山形高峻有登眺之趣), 대덕산(563m)은 일명 ‘삼방산’이라 하며 정상부에 석성이 있고 중턱에 삼방사지가 있다. 대등산(大登山)[큰등]【산】본동에서 북쪽의 최고봉을 대등산(478.5m)으로 일명 ‘큰등’이라 하며, 초막골과 투수골의 중심지이다. 이곳은 참나무가 군락을 이루면서 부엽토가 쌓였다. 대산(垈山)【산】→ 퇴미산. 도둑골【골】 본동의 동쪽에 산베이를 거쳐서 투수골 넘어 가는 사이의 협곡이 있는데 도둑놈이 소를 훔쳐가도 사방에서 보이지 않고 음산한 곳이라 하여 ‘도둑골’이라 부른다. 도랑내치기【내】황석리 본동 초막골과 투수골에서 흐르는 도랑물이 남한강으로 합류한다고 하여 '도랑내치기'라고 한다. 예전에는 수풀이 우거지고 음침하여 도둑의 은거지였으며, 호랑이도 출현했다는 전설이 있다. 수몰. 돌다리1【마을】본동에서 서쪽으로 약 1㎞에 소재한 황석국민학교 입구에 위치한다. 신작로를 개설하기 전에 장시가 열린 곳으로 장선리, 단돈리, 사오리, 방흥리, 진목리, 오산리, 본동의 곡물을 거상이 사서 수로를 통한 선박으로 서울과 교역을 하면서 주점, 잡화상, 주택이 들어섰다. 돌다리→돌따리로 변천되었다. 수몰. 돌다리2[石橋]【다리】본동의 자연부락 돌다리에 소재한 황석국민학교 서쪽에 후산리와 황골에서 흘러온 계곡물을 건너서 재구미와 방흥리로 건너는 돌다리를 말한다. 이 돌다리로 인하여 동쪽에 소재한 자연부락의 지명이 돌다리가 되었다. 수몰. 동고사터【제당】대덕산 동고사터(해발 180m)는 도로에서 동북동(60도)향으로 177m 거리에 있다. 동제시 제물을 진설하고 향을 피우는 석조물 제단이 현존해 있으며, 해마다 정초에 동민의 안녕을 기원하며 산신제를 봉행한 제당이다.동제는 투수골과 초막골 두곳에서 지낸다. 특이점은 투수골의 투수는 남성의 상징 ‘토시’라 하고, 초막골은 여성의 상징 ‘치마’라 하여 투수골을 먼저 지내고, 초막골은 후에 지내며 진설하는 제물도 각기 다르다. 축문이 있다. 동구호치(洞口虎峙)【고개】본동의 동편에 달맞이 동산(157.5m)에서 달집태우기를 하던 망월산으로 올라가는 고개에 호랑이가 통행하는 고개를 말한다. 동산【산】본동 아랫말 우편에 수백년 수령의 동갈나무가 있었던 야산을 말한다. 동갈나무에 그네를 매어 놓았는데 마을에 살던 처녀가 그네를 그르다가 작은 연못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수몰. 돼지구대이[猪穴]【굴】초막골 자연부락 북쪽에 참나무 군락지에 멧돼지가 서식하여 산돼지를 잡기 위하여 함정을 팠다하여 '돼지구대이'라고 한다. 아직도 함정을 파놓은 흔적이 있다. 된비알【산】본동의 동쪽에 범대미를 지나 퇴미산을 거쳐 산비알을 경유하여 조터골을 거쳐 대덕산 정상으로 오르는 산길이 너무 고돼서 ‘된비알’이라 한다. 두릉갱이【산】초막골 자연부락 북동쪽 불개미등에서 딱박골 능선을 ‘두릉갱이’라 한다. 두멍소【소】본동 집앞에 강건너편으로 강물은 수심이 깊어서 명주실 한타레가 다 들어가도 모자란다는 속설이 전한다. 두멍소의 최대수심은 약 15~20m이며, 가뭄에도 약 10m이다. 두멍소에 ‘침향’이라 불리는 나무가 천년이상 물속에 가라앉았는데, 가뭄이 심할 때 침향을 건드리면 장마가 진다는 속설이 있다. 실제로 몹시 가물 때 황석 동민이 잠수하여 침향을 조금 건드리면 비가 오고 너무 많이 건드리면 장마가 진다고 한다. 두멍소는 큰 암반으로 형성되었으며 침향 밑에는 천연기념물 황쏘가리가 무리지어 서식했다. 두멍소의 지형은 황석 강가는 수심이 얕고 계산쪽으로 깊은데, 삿대가 짚이지 않는 곳으로 외지인이 강바닥의 지형을 모르기 때문에 익사가 빈번했다. 수몰. 뒷골【마을】→ 후곡(後谷). 딱박골【골】초막골 자연부락 북동쪽에 불개미등과 어름등갱이까지 산이 험하지 않고 밑밑하게 딱벌어졌다하여 ‘딱박골’이라 하며, 또 닥나무가 많다고 하여 이름한다. 이 산은 황석리 문화류씨 공동소유로 일명 ‘동네산’이라고 부른다. 딱지소【제지】新황석리에서 황골로 넘어가면 도랑가에 닥나무의 닥채를 벗기는 시설물과 제지공장이 있었다. 또 본동 투수골에도 딱지소가 있었다. 수몰. 때봉[茅峯山]【산】본동에서 서쪽에 안구미들에서 북쪽의 야산은 남향으로 경사로 띠가 잘 자라서 띠를 채취하여 농한기에 자연산 띠자리를 만들었다. 현재 수몰된 황석리와 신황석리 도로 아래 소재한다. 일부 수몰. 마장터(馬場-)【터】본동의 동쪽에 대덕산 투수골에 우마차가 올라가지 못하는 편평한 곳에 우마차를 세워두고 사람이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하여 싣고 오는 터를 말한다. 망아지등【산】 본동의 북쪽 큰등 아래 망아지처럼 생긴 작은등을 말한다. 묘선재(慕先齋)1【제실】1984년 신황석리 응봉 아래 모선재를 건립하여 문화류씨의 입향조 류희석(柳熙錫) 이하 선고조비의 위패를 봉안하여 매년 음력 10월 첫째주 일요일에 황석리, 후산리, 월굴리 등지의 문화류씨 후손이 모여 세향을 지내고 있다. 문화유산은 교지, 사례용품, 호구발취 은채, 지석 등이 있다. 묘선재(慕先齋)2【비】1984년 11월 문화류씨 제당 모선재를 신축한 기념으로 1995年 11月 30日 재실 입구 도로변에 모선재비를 세웠다. 물밑거리【내】대덕산 투수골 계곡물이 흘러온 투수골 첫집에 이르는 지점을 ‘물밑거리’라고 한다. 청풍호 갈수기에 드러난다. 밤나무밭[栗田]【밭】초막골 자연부락 남쪽에 자연생 밤나무가 군락지를 이루어 ‘밤나무밭’이라 한다. 현재 수확기에 혼자서도 한나절에 두말정도의 알밤을 거뜬히 줍는다. 밧치재【고개】 밧치재(195m)는 수몰전 황석국민학교 북서쪽에 단돈리, 사오리, 부산리, 장선리 주민이 고개까지 오르면 숨이 턱에 찬다 하여 ‘밧치재’라고 한다. 1960년대 황석리 주민은 농한기에 밧치재의 도로 확장 공사에 참여하여 공사대금으로 밀가루로 급료를 받았다. 현재는 지방도로를 확장하여 차량이 다니며 밧치재에서 右편으로 성치산성으로 오르는 능선이다. 방-꼴【마을】→ 황꼴. 범-여울[호탄]【여울】→ 황석리 앞 한강에 있는 여울. 수몰. 범대미[虎垈尾]【산】본동의 동쪽에 망월산에 호랑이가 왕래하는 산이라 하여 ‘범대미’라 한다. 범에골【굴】초막골 자연부락 밤나무밭 옆에 큰 돌 사이에 굴이 있는데 호랑이가 살았다 하여 ‘범에골’이라 하며, 일명 ‘호랭이굴’이라 한다. 병풍바위【바위】대덕산 조터골 건너편 넓적한 암석이 병풍처럼 생겼다하여 '병풍바위'라고 한다. 이 바위 밑으로 소로가 있었다. 복동지【보】초막골에서 흐르는 계곡물을 이용하여 논농사를 짓기 위하여 보를 막아서 논농사를 경작했다 하여 ‘복동지’라고 한다. 이곳은 원반형으로 수심이 깊어서 여름철이면 다이빙을 하고 목욕을 하던 곳으로 익사사고가 빈번하여 보를 폐쇄시켰다. 수몰. 봉우재【봉수】초막골 자연부락 서쪽 봉우리(438m)에 옛날에 봉화불을 놓던 자리라고 하여 '봉우재'라고 한다. 이 자리에서 기와장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부두락골【골】신황석리 삽작골의 큰고개 넘어서 류원혁씨가 밤나무를 심은 지역으로 미래에 배를 정박한다 하여 ‘부두락골’이라 하였으나 지금은 배를 정박할 수 있다. 일부 수몰. 부처바위[佛岩]【바위】본동에서 북쪽으로 초막골 계곡에 부처바위가 있다. 부처바위는 흉고에 삼각뿔 크기(20㎝×10㎝)의 깊이에 있었던 불상을 주민이 꺼냈다고 한다. 부처바위에 글도 씌어 있었고 돌 아래서 공부를 했다고 한다. 지금은 묵서명을 헤아리기 힘들다. 옛 황석리에서 북쪽으로 도로 아래에 해발 150m에 소재한 부처바위는 석영편마암으로 선돌을 쪼갠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불개미등【산】초막골 자연부락 북동쪽 등성에 소나무와 황토 흙이 있는 곳에 불개미가 무리를 지어 엄청나게 많아서 ‘불개미등’이라 한다. 불개미는 약이 된다고 하여 퍼갔으나 아직도 불개미가 많다. 불당골[佛堂谷]【골】본동의 초막골 동제당 위에 부처바위가 있다. 이 바위에서 유래한 불당→불당곡→묵당골→북당곡로 변천했다. 북당골의 능선을 중심으로 좌편을 ‘큰북당골’ 우편을 ‘작은북당골’이라 부른다. 비득치(飛得峙)【고개】곱돌광산 위로 넘어가는 고개로 일명 '작은재'라고 부른다. 현재 삽작골에 이주한 황석리의 동구밖이다. 비멸(扉-)【들】황석리 동구 일대를 ‘비멸’이라 한다. 이곳에서 선사시대에 사용한 불먹은 돌화살촉, 고인돌 아래에 돌검이 주민에 의해 발견되었다. 수몰. 뺑뺑이길【길】초막골 올라가는 길이 험하고 꼬불꼬불하다하여 ‘뺑뺑이길’이라 한다. 산베이【산】본동의 동쪽에 황석나루 못미처 양수장 뒷산에 경사가 가파른 곳에 개간한 밭의 형세가 산을 등진 모습 같아서 '산베이'라고 한다. 수몰. 산화철광산(酸化鐵鑛山)【광산】 황석국민학교 동편 삽작골 능선에 산화철 광산이 있었다. 이 광산은 선사유적지의 뒤편이여서 선사인이 제조한 단도마연토기(丹陶磨硏土器)의 도색의 원료로 사용한 것을 유추할 수 있다. 황석리에 산화철광산이 모두 3곳 있었다. 일부 수몰. 살개여울[箭灘]【여울】황석 앞강은 동서로 흐르다가 재구미에서 북서로 회절하는 지점에서 후산리와 황석리의 자연부락 황골에서 흘러온 계곡물이 남한강과 합류하여 소를 이루면서 방흥쪽으로 화살처럼 급류를 이루어 ‘살개여울’이라 한다. 수몰. 삼각바위(三角--)【바위】황석나룻터 물가에 나룻배가 정박할 때 줄을 메어 둔 바위로 끝이 뼈족한 삼면체의 바위를 말한다. 수몰. 삽작골 여우굴【굴】 황석들 안구미에서 북쪽의 삽작골에 여우굴이 있었다. 황석리는 문화류씨 집성촌으로 타성이 여우굴에서 여우를 잡기 위하여 굴에다 불을 지펴서 연기를 피우는데 여우가 헌 이불을 뒤집어쓰고 나오는 바람에 그 사람은 엉겁결에 기겁하여 “나도 류씨입니다.”라고 꿇어 앉아서 여우에게 비니까 여우가 도망을 갔다고 전한다. 삽작골은 어린이가 죽으면 옷가지와 퍼대기 등을 함께 싸서 묻었던 곳으로(애장굴) 여우의 전설은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수몰. 삽작골 옻샘【샘】현재 신황석리를 조성한 삽작골에 옻나무가 많았는데, 그 아래 샘물을 ‘옻샘’이라 한다. 현재 옻나무는 없으나 황석리 본동 옆에 샘물이 솟는다. 삽작골[扉谷]【골】삽작골은 비곡(扉谷)으로 사립문짝 비(扉)는 골짜기 입구가 사립문의 형상으로 삽작골[扉谷]이라고 한다. 삽작골에 들어서면 아늑하면서도 평탄한 계단식 주거지로서, 천연 샘이 솟아 수원이 풍부하여 오래 전부터 주민이 거주한 집터의 흔적이 서너채 있었는데, 황석리에서 머슴을 살았던 경상도 김씨가 거주한 적이 있다. 일부 수몰. 상상말개이【산】본동의 뒷골 산등강(160m)은 소등처럼 생겨다하여 ‘상상말개이’라고 부른다. 새들갱이【밭】초막골 자연부락 밤나무밭 아래 평지에 새로 개간한 들에 메밀을 많이 심어서 '새들갱이'라고 불렀다. 새마을【마을】본동의 자연부락 돌다리와 재구미는 1972년 대홍수로 건물이 전파되어 황석초등학교 뒤쪽 황골의 골짜기에 새로 조성한 부락이라 하여 ‘새마을’이라 하여 20가구에 100여명이 살았다. 수몰. 샘터【샘】본동은 수원이 풍부하여 아랫말은 두레박 샘 3곳, 바가지 샘 1곳, 투수골은 바가지 샘 2곳, 지하수 펌푸샘을 이용한 5가구가 있었다. 1973년 퇴수곡에 상수도 파이프를 매설하여 각 가정에 수도를 설치하였으나 수몰전까지 기존의 샘물은 물맛이 좋아서 계속 이용했다. 수몰. 서낭데이【서낭】본동에서 남서향의 신작로를 따라 약 200m 지점에 느티나무 여덟 그루가 있는데 ‘서낭데이’라 하며, 일명 ‘당숲’이라 하여 금줄을 치고 안택고사를 지냈다. 수몰로 느티나무는 벌목하였다. 서머리【내】본동의 계곡물이 남서쪽 도랑내치기 아래 강물의 합수 지점에 강변이 우먹하게 침식한 지역으로 장마가 지면 모래섬이 형성된다고 하여 ‘서머리’라고 불렀다. 수몰. 서머리들【들】선돌이 소재한 도랑내치기 강변의 남쪽 들판을 말한다. 사질층으로 참외와 뽕나무를 많이 심었다. 수몰. 석이(石耳)바위【바위】 본동에서 초막골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서 계곡 건너 우측편(해발 175m) 바위에서 석이가 자생하여 석이바위라고 한다. 주민은 석이를 따다가 잔치상 국수 위에 잘게 썰어서 소량을 얹어서 먹었다. 선돌 고목(老巨樹)【나무】본동 서쪽 당숲에서 서쪽으로 50m 지점에 선돌 앞에 보호수로 지정한 300년 수령의 두 그루가 남북으로 1.5m 사이에 있다. 강쪽은 수고 19m, 둘레 4.6m, 안쪽은 수고 18m, 둘레 4.5m이다. 이 느티나무는 속이 비었으며 구렁이가 살았다. 수몰로 벌목하였다. 성치산재피곡(城峙山宰皮谷)【골】본동의 자연부락인 재구미 뒷산 성치산성(城峙山城) 아래 골짜기를 말한다. 소경바위【바위】초막골 올라가는 뱅뱅이길 옆에 옛날 초막골에 살았던 힘센 장사 소경이 한 손으로 들어다 놓아다고 하여 '소경바위'라고 한다. 또 소경바위 아래 원래 길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소경바위 위로 지나간다 하여 ‘소경바위’라고 한다. 또 소경바위의 형상이 마치 사람이 돌아서 앉았다고 하여 ‘소경바위’라고 한다. 현재 소경바위는 초막골로 올라가는 도로의 개설로 약 10m 아래 위치하여 오르면서 볼 수 없다. 소등산(小登山)[작은등]【산】대등산에서 약 75m 남쪽에 작은 봉우리를 작은등(469.8m)이라 하며, 소등에서 보면 황석리 본동과 남한강이 한눈에 조망된다. 솔경지【나무】본동의 서쪽에 고야말게는 1960년대 이전에 밤나무 등이 우거져서 재구미 주민들이 나무에 그네를 매어서 뛰었으며, 소나무가 많아서 ‘솔경지’라고 불렀다. 수몰. 수석밭[壽石田]【돌】본동의 강변에 기이한 형상의 오석과 청석이 분포하여 수석 채집자가 운집하여 수몰 직전에는 강물까지 들어가서 채집하였다. 수몰. 숯구대이【터】초막골 자연부락에서 북동쪽으로 어둠골과 불개미 등을 넘어서 북쪽의 딱박골로 가기전에 밭이 있었는데 옛날에 참나무 숯굽던 터로 검은 재흙이 발견된다. 숲거리【숲】본동의 집앞에 강변 소로에 동서로 약 200m에 걸쳐서 느티나무, 휘추리나무, 참나무 등의 고목이 길의 좌우에 가로수를 형성하여 마을의 방풍림과 풍치림의 역할을 했으나 1972년 대홍수로 모두 뿌리째 뽑혔다. 수몰. 숲앞에【숲】본동의 집앞에 강변에 아카시아나무와 숲이 우거져서 '숲앞에'라고 한다. 수몰. 쉬는터【터】응봉에서 북쪽의 능선은 초막골과 황골이 조망되는 곳에 넓적한 반석은 원가지에서 나무를 하여 내려올 때 쉬는 곳이라 하여 '쉬는 터'라고 한다. 승지골【골】투수골의 계곡길을 따라 대덕산 정상 못미처 대덕산성 아래 골짜기를 말한다. 이곳에서 류인두(1924~1987)씨가 소죽통을 만들고 있을 때 담비[獺]가 떼를 지어 덤벼들어서 기겁을 했다고 전한다. 시루산【산】→ 퇴미산. 아들바위【바위】황석나루에서 성내리 은행정 못미처 신작로 절벽에 움푹 들어간 부분에 돌을 던져서 쏙들어가면 아들을 낳는다고 하여 ‘아들바위’라고 한다. 수몰. 아래말[下里]【마을】→ 큰다리목. 안구미[內九尾]【들】본동의 서쪽에 있는 때봉 산하의 들판을 말한다. 안구미는 강변에 비해 지대가 낮아서 장마철 한강물이 범람하여 재구미에서 치어 올라오면서 부유물질이 충적층을 이루어 땅이 기름졌다. 수몰. 애향기념식수비【비】충주댐 수몰민 황두리회에서 신황석리 동구에 1993년 5월 3일 느티나무 50그루 심고 ‘애향 식수 기념비’를 세웠다. 현재 도로변에 느티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양수장【양수장】본동의 동쪽에 1946년 호탄 바로 위의 강가에 류원혁(1921~)씨 과수원내 양수장을 설치하여 한강물을 끌어 올려 논농사를 3년간 경작했다. 양수장에 300마력의 소련제 탱크 엔진을 설치하였으나 잦은 고장으로 부품을 구하기도 힘들고 전기세와 수세를 감당하지 못하여 폐쇄했다고 한다. 수몰. 양지골【골】초막골 자연부락 북쪽에 양지를 일컬어 ‘양지골’이라 한다. 양지골 아래 현재의 지목은 대지로 황석리 4번지이다. 어둠골【골】초막골 자연부락 밤나무밭과 불개미등 사이 동쪽에 구렁이 있다. 어둡고 골이 깊으며 숲이 무성하다하여 '어둠골'이라고 한다. 어으름등【산】초막골 앞산 양쪽의 등강을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서 개간하여 조(粟)를 재배하였다고 하여 '어으름등'이라고 한다. 열목새【강변】본동의 남동쪽 호탄의 강변과 강물을 아울러 열목새라고 불렀다. 강변에 풀이 무성하여 한우를 방목하였다. 수몰. 옷갈비침【산】본동에서 북쪽으로 초막골 개바닥(물 내려오는 바닥)에서 투수골로 빠져 큰등으로 가는 길을 ‘큰옷갈비침’이라 하며, 초막골 개바닥에서 산록을 ‘작은옷갈비침’에 소재한 바위 아래 20여명 들어갈 정도로 굴이 있는데, 일명 '호랭이 굴'이라 한다. 요골[腰谷]【골】본동의 동쪽 동구밖에 공동묘지의 등강을 넘어 산베이 사이의 구렁을 말한다. 이곳에서 여우가 나타나기도 했다고 한다. 일부 수몰. 웃말(上里)【마을】→ 큰다리목. 원가지[一枝路]【길】본동에서 북향의 황골 등갱이 길이 험준하여 ‘원가지’라 한다. 은장굴금광【광산】황골에서 초막골로 넘어가는 중허리에 광산이 있었는데 비알이 가파른 곳으로 일본인이 채광한 광산이 있다. 1970년경 폐광에 들어가 광산에 필요한 데꾸도 가져왔다. 아직도 광산 주위에 돌덩어리에 은과 금이 섞여 있다. 응봉(鷹峰)[매봉산]【산】황석리는 문화류씨 재실의 산줄기를 따라 올라가면 정상이 응봉(422m)이다. 매응(鷹)자와 봉우리 봉(峰)자를 합성하여 ‘매봉산’이라 칭하며, 응봉에서 황골로 비껴가는 길을 ‘매뱅이길’이라고 부른다. 응봉은 조선시대 황석팔경 중의 하나이다. 인삼밭침[人蔘田峙]【산】황석리 북쪽에 응봉을 넘어서 등강이에 산삼을 캤다는 인삼밭이 있다. 인삼밭치→인삼밭침으로 변천했다.이곳에서 류원혁씨 머슴이 갈 한짐을 베 왔는데 인삼 싹이 반이 넘어서 주민이 그곳에 가보니 인삼은 하나도 없어서 캘 수 없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山蔘이 자생하여 산삼을 뽑아다 먹고 벌을 받았다고 전래한다. 자라바위[鼇岩]【바위】본동의 공회당에서 정남향으로 강물까지 약 375m에 이른다. 강가에서 강물속으로 약 50m 지점에 물속에 잠긴 바위의 모습이 자라의 형상이며, 가뭄에 가끔 바위에 자라가 오른다 하여 ‘자라바위’라 한다. 여름철에 헤엄을 치다가 힘에 부치면 자라바위에 올라가 쉬기도 했다. 수몰. 재구미(才九味)【마을】본동의 자연부락인 재구미는 서쪽으로 약 1.25㎞ 지점에 성치산성 아래 궁형으로 굽이진 곳에 위치한다. 장마가 지면 재구미 앞으로 흐르는 계곡물이 치올라 황석리 안구미에 이르기까지 한강이 범람한 곳으로 충적층이 형성한 기름진 옥토이다. 재(灰)처럼 충적층이 쌓였다 하여 '재구미'라 하고 안쪽에 '안구미'의 지명도 같은 맥락이다. 수몰. 잿구데이【터】대덕산 승지골에 편평한 개간밭에서 화학비료가 없을 때 나무를 태운 재로 시비했다. 조터골【골】본동에서 동향에 투수골의 병풍바위에서 동향으로 대덕산 골짜기를 말한다. 조터골에서 하산하면 투수골과 연계되어 식수원이 풍부하여 대덕산성에 주둔한 군사들의 식수원으로 전한다. 조터골에서 성으로 올라가는 길은 돌서랑으로 거대한 절벽 위에 편평석은 경관이 수려하다. 황석리는 유교풍속으로 60년전에는 여인들이 한강에서 목욕을 함부로 할 수 없을 만큼 남녀유별이 심하여 처녀들이 조터골에서 피서를 즐겼다. 좁은골【골】초막골의 자연부락 동쪽에 어둠골 아래 골짜기가 좁아서 '좁은골'이라고 한다. 지경바위【바위】본동의 동향에 퇴미산에서 대덕산 등산로에 요골과 조터골의 경계가 되는 암석을 가리켜 '지경바위'라고 한다. 지석-묘(支石墓)【고적】→ 고인돌 支石墓【고적】→ 고인돌. 집앞에 강변트랙【운동장】본동의 집앞에 강변의 잔디에 타원형의 트렉을 만들고 학생은 향우회를 조직하여 일요일 아침마다 릴레이와 체조를 하였다. 수몰. 집앞에 고목(老巨樹)【나무】본동의 정남향 집앞에 강쪽으로 약 70m 지점에 수몰전 보호수로 지정한 300년 수령의 느티나무 노거수가 있었다. 크기는 수고 18m, 둘레 4.5m이다. 수몰로 벌목하여 반출하였다. 수몰. 집앞에 숲거리【숲】본동의 집앞에 강변로에 풍치림을 ‘숲거리’라 한다. 1972년 8월 대홍수로 인하여 풍치림의 거목들이 뿌리째 뽑혀서 집앞이 황량해졌다. 수몰. 집앞에 우마차 길【길】조선시대 본동에서 집앞에 강변까지 우마차가 왕래하던 소로를 말한다. 이 길로 소금과 곡물과 교역했다. 수몰. 집앞에 주막집【집】본동의 집앞에 강변으로 가다가 강변길의 교차로 우측에 권장식씨 부모가 운영하는 4칸의 초가집 주막에서 뱃사람, 뗏목꾼들이 숙식했다. 이 주막집은 1936년 병자년 수해 때 떠내려갔다고 전한다. 집앞에 강변은 드넓어서 상류지역에서 뗏목이 흐트러진 부분을 다시 엮던 곳이다. 수몰. 찬샘내기[冷泉湧水]【샘】본동의 서쪽에 격강의 계산리와 황석리를 도강하는 나루터의 강변에 찬물이 연이어 나는 솟는 곳으로 ‘찬샘내기’라 한다. 수몰. 천곡(泉谷)【샘】본동의 서쪽 활석광산 골짜기에 샘물이 솟아서 ‘泉谷’ 또는 ‘천동(泉洞)’이라 한다. 수몰. 초막골(草幕谷)1【골】본동의 중심지 큰다리에서 좌측으로 초막골에서 흘러온 계곡물을 따라 左右에 소재한 집들을 초막골이라 불렀다. 수몰. 초막골(草幕谷)2【마을】본동의 초막골에서 북쪽으로 약 1.5㎞ 지점에 해발 290~300m에 소재한다. 현재 도로에서 초막골까지 약 1㎞이다. 초막골은 풀로 움막을 짓고 짐승을 키운다고 해서 '草幕谷'이라 한다. 초막골에 입향한 주민은 김덕화씨가 거주한 이래 류흥고(1855~1939)씨가 거주하면서 서로 어울려서 개간하며 조를 심었다. 황석리 류인갑씨, 본관이 전주류씨인 류용삼씨, 류수복씨, 류인수씨, 이복수씨가 거주했으며, 이곳의 주민은 화전으로 담배, 밀, 고추, 메밀 농사를 지었다. 초막골 거주민은 대부분 본동으로 주거지를 옮겼고 수몰로 인하여 황석리 본동전체가 타지역으로 이주하면서 고립된 부락으로 1984년까지 모두 이주하였다.충주댐 수몰후 류총열씨가 황석리 14번지, 이영희씨 황석리 23번지에 두집이 기거하면서부터 전기가 가설되고 차량이 초막골 본동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현재 류총열씨는 염소와 사슴 목장의 축산업을 경영하고 있다. 초막골에는 참나무에 서식하는 영지버섯, 표고버섯 등 자연생태계가 보존되고 있으며, 너구리, 산돼지 등이 서식하고 있다. 초막골 서낭【서낭】초막골 자연부락 초입에 첫집을 조금 지나서 느티나무를 ‘서낭’이라 한다. 느티나무가 벌목되고 소나무가 서낭의 역할을 했다. 이 서낭은 류총열씨 증조부 류흥고(1855~1939)씨가 초막골에 거주하면서 사냥하기 전에 기도를 드리면서 유래했다. 초막골 제당(祭堂)【제당】本洞의 북쪽에 초막골 맨 윗집에서 수백보 위에 부처바위 아래 제당이 소재한다. 대덕산 동제를 지낸 후 초막골 제당에서 지낸다. 특이점은 제주는 제당 옆 땅속에 묻어서 사용하며 통돼지를 사용한다. 수몰. 큰다리목【다리】초막골과 투수골의 계곡물이 합류하여 본동의 중앙에서 아랫말로 흐르는 큰 도랑을 건너는 다리를 '큰다리목'이라 하였다. 이 다리를 중심으로 웃말과 아랫말로 구분하여 줄다리기를 하였다. 또 웃말은 뒷골, 초막골, 투수골의 세 개의 자연부락으로 나누었다. 큰다리목은 새마을 사업 이전에는 통나무와 잔솔가지 나무를 얹고 흙을 쌓은 다리였다. 본동의 교각은 모두 10개가 있었다. 수몰. 큰등썰매길【길】큰등에서 나무를 하여 작은등에서 지게 양쪽에 나무를 메달아 끌어내렸다 하여 ‘큰등썰매길'이라고 한다. 큰재[大邱峙]【고개】현재 삽작골 新황석리에서 후산리로 가는 도로의 커브 지점으로 예전에는 삽작골에서 황골로 넘어 가는 ‘큰고개’를 말한다. 또 큰재에서 삽작골 앞산을 ‘대구치’라고 부른다. 퇴미산【산】퇴미산(190.7m)은 본동에서 동쪽에 위치한다. 퇴미산의 형세는 흙을 쌓아 놓은 모습이라 하여 ‘태미안’이라 하며, 또 시루 모양이라 하여 '시루산'이라고 한다. 이 산의 정상부에 묘소의 광중을 팔 때 기왓장 조각이 출토되었다. 이 산에 사람이 거주하여 ‘대산(垈山)’이라 한다. 퇴미안【산】→ 퇴미산. 퇴수골[退水谷]【골】본동의 초입에 김활란씨의 외조부 윤판서가 거주할 때 투수골의 물을 집까지 끌었다고 전한다. 본동의 동편 산허리에 도랑을 만들고 기와를 연결하여 물의 누수를 막아서 집까지 물이 돌아서 흐르게 했다하여 ‘퇴수곡’이라 한다. 일부 수몰. 투수골1【마을】본동의 지형은 Y자형으로 동북동향으로 투수골, 북서향으로 뒷골과 초막골이다. 마을의 중심지에 큰샘물에서 대덕산 골짜기에 이르기까지 ‘투수골’이라고 광역적으로 불렸고, 큰다리목에서 투수골의 마을을 투수동 (投水洞)으로 불렀다. 수몰. 투수골2【골】 본동의 큰다리목에서 북동향에 대덕산 골짜기를 말한다. 투수골에서 돌을 손으로 던지는 투석전을 하던 곳으로 전한다. 또 암수줄다리기를 하다가 양편의 젊은이들이 날을 잡아서 투수골에 가서 투석전을 하였다. 투수곡으로 변천했다. 평밭[平田]【밭】 평밭은 두곳으로 큰등과 대덕산 사이에 2정보 개간한 밭을 말한다. 또 초막골 밤나무밭 앞에 밭이 편평하다 하여 '평밭'이라 한다. 하륜치곡(下倫峙谷)【골】본동의 북쪽에 대등산 아래를 말한다. 항골[項谷]【마을】본동에서 북쪽에 위치한 황골은 지금의 황석리 큰고개를 넘어서 통했다. 평지의 길은 본동에서 서쪽에 돌다리에서 북쪽으로 황석국민학교를 지나 후산리와 갈림길에서 북동쪽으로 새마을을 지나서 오르면 황골(석교-황골 약 2㎞)이다. 황골의 형세는 길쭉한 목이라 하여 ‘항골’이라 하며, 항골→황골→황꼴로 변천했다. 황골에 거주민은 화전민으로 형성된 자연부락이다. 황골에는 자연생 참나무가 많아서 숯가마를 만들어 숯을 제조하며, 참나무의 열매인 도토리를 주워다가 묵을 만들어 먹었으며 밀원이 풍부하여 토종 벌통을 배치했다. 일부 수몰. 한-똘【마을】→ 황석리. 항곡율목봉(項谷栗木峰)【산】항골에 자연생 밤나무 군락지를 말한다. 현재 개량 밤나무를 식재하여 알밤을 줍는다. 호-탄(虎灘)【여울】→ 범여울. 호랭이굴【굴】→ 범에 굴. 호탄(虎灘)【여울】황석나루 하류에 강여울을 호탄이라 한다. 이 여울로 호랑이가 왕래하여 ‘범에여울’이라 한다. 호랑이는 비봉산에서 호탄을 건너 황석리 초입에 호혈을 지나 황석리 망월산 호대미를 거쳐서 대덕산으로 왕래했다고 한다. 류용학씨는 호탄에서 도롱이를 쓰고 전지 낚시를 할 때 물살이 갈라지면서 호랑이가 건너오더니 ‘후드득’하고 물기를 떨칠 때 눈길이 마주쳐서 혼비백산하여 그 길로 집에 들어와서 아침에 나가보니 누치가 걸려 있었다고 전한다 수몰. 황-꼴[방꼴]【마을】→ 황석 북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 수몰. 황-뜰【마을】→ 황석리. 황골매베이【길】삽작골에서 황골로 올라가는 산길의 형상이 매가 웅크리고 있는 형상으로 '황골 매베이'라고 한다. 황도(黃道)【마을】→ 황석리 황도리(黃道里)【마을】→ 황석리 황두-리【마을】→ 황석리. 황석(黃石)【마을】→ 황석리 황석국민학교【학교】본동에서 서쪽으로 약 1㎞ 지점 석교[돌다리] 뒤편에 위치한다. 1946년 8월 20일 황석공립초등학교 설립인가로 1946년 9월 1일 개교하여 동족상잔으로 학교의 폭격으로 임시 교실로 안구미 류인달씨 과수원 건물, 선돌 느티나무, 투수골 류인현씨 사랑방에서 분산하여 배웠다. 충주댐 수몰로 미침수 지역 후산리에 이건하여 1985년 3월 1일 금성초등학교 황석분교장으로 격하되고 학생수의 급감으로 1987년 3월 1일 폐교되어 청소년 야영장으로 전락되었다. 황석국민학교는 개교이래 황석리, 후산리, 방흥리, 사오리, 단돈리, 부산리 등지의 학생이 수학했으며 1,696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교가] 금수강산 어린구름은 우리의 정열이요/ 한가람 줄기찬물은/ 우리의 근기라/ 황석교 건아들아 앞을 보아라/ 새나라 새일터가 우릴부른다. 수몰. 황석나루[黃石津]【나루】본동에서 동쪽으로 약 1㎞ 지점에 황석↔광의間 나루이다. 황석리 대덕산 아래 구들벼루의 강은 수심이 깊어서 뗏목을 대고 상선이 정박하여 곡물과 해산물을 교역한 곳이다. 1935년경 제천과 충주간 도로가 개통되면서 차량을 도선하는 황석나루가 개설되었다. 최초의 찻배는 차량 한 대를 선적할 수 있었으나 군청에서 선박을 건조하면서 차량 2대를 승선시켰다. 찻배의 크기는 약 30m의 길이에 20톤으로 버스와 택시를 동시에 도선하였는데, 뱃사공 6명이 삿대질하였다.1972년 이전에는 군청소유로 건조한 찻배를 청풍면에서 입찰을 대행하여 낙찰자가 1년간 운행했다. 1960~1972년까지 류인순씨는 12년간 입찰을 받았으며 그 사이 광의리 엄만출씨가 1회 입찰로 선박을 관리했다. 1972년 대홍수에 목선의 찻배는 떠내려가고 서울 잠실대교를 건설하기 전에 도선하던 철선을 구입하여 수몰전까지 사용했다. 이 배에 기관배가 딸려왔는데, 낡아서 사용을 하지 못하고 12마력 엔진의 기관배를 부산에서 주문하였으나 처음에는 사용법을 몰라서 그냥 세워놓았다. 기관배는 핸들이 아니고 키를 잡아서 운전하는 것으로 넓적한 철판을 좌우로 움직여서 도선했다.박삼성(63세)씨가 기관배의 조작법을 익혀서 기관배에 찻배는 2명이 전후에서 2명이 운행했다.수몰전 배삯은 버스 1300~1500원, 일반인 배삯은 200~300원, 급한 사람은 500원을 받았다. 황석나루로 도선하는 완행버스는 8시, 10시, 1시, 3시, 5시 간격으로 충주 제천간 버스가 渡船했다.사공은 식사할 사이도 없이 찻배를 건너야 했기 때문에 인도선은 장마철을 제외하고는 주민이 직접 도선하였다. 인도선은 50인용으로 학생, 장삿꾼, 주민 등이 왕래하였으며, 황석리 주민의 뱃삯은 여름에 보리한말, 가을에 수숙, 메밀, 콩 등을 냈다. 황석나루의 인도선과 찻배는 1983년 12월까지 운행하였다. 황석나루 선주와 뱃사공은 정초에 배 위에서 떡과 주과포를 차리고 용왕제를 지내고 제물을 강에 던진 후 보름까지 배를 무사히 도강할 수 있도록 배에 상을 차리고 그 위에 그릇을 비치하여 주민이 돈을 넣는 풍속이 있었다. 수몰. 황석도로(黃石道路)【길】충주댐 수몰후 개설한 532번 비포장 지방도로이며 황석~오산간 16.8㎞이다. 황석리(黃石里)고인돌【고적】1961년 류강열씨가 마제석검, 석족, 단도마연토기를 국립박물관에 제출하여 전국 최초로 발굴 계획을 세웠다. 강안(103m)에 고인돌은 약 1,300m의 범위에 46기가 2줄로 분포되었다. 국립박물관에서 1962년 3월, 9월에 2차에 걸쳐 18기의 고인돌을 발굴하였고, 충북대박물관에서 1982년, 1983년 2차에 걸쳐 8기의 고인돌을 발굴하였다. 특히 고인돌 13호에서 완전한 인골과 부장품으로 석검을 발굴하였다. 수몰. 황석리대덕산성(黃石里大德山城)【산성】 대덕산 정상부(476m)에 소재한 석성의 둘레는 약 237m이며, 산성에서 남동向으로 청풍읍리를 향하여 봉수태지가 있다. 일제는 대덕산의 정기를 끊으려고 쇠말뚝을 박았다고 전하며, 동민은 석성의 남쪽 성안에서 콘크리트로 만든 말뚝을 뽑아서 공회당에 보존했으나 멸실되었다. 황석리 마을회관【회관】신황석리는 1991년, 1995년도 충청북도 도지사?청주지방 검찰청 검사장이 ‘범죄 없는 마을’로 선정됨으로서 정부에서 현대식 마을회관을 건립하였다. 수몰민은 귀향하여 안식을 취한다. 황석리 산상사지(山上寺址)【절터】신황석리 마을 서측의 밭에 해발 160m에 소재한다. 일제시대 방석수씨가 금동불(30㎝)을 발견하여 한 스님에게 시납하였고, 해방 직전에 금동불(10㎝)은 파손되었다. 이 유물은 출처를 알 수 없다.현재 와편과 토기편이 발견되고 있다. 황석리 삼방사지(三方寺址)[대덕산절터]【절터】본동의 동쪽 대덕산 중턱(238~244m)에 소재한다. 대덕산의 별칭 삼방산을 인용하여 ‘삼방사지’라 하며, 일명 ‘대덕산절터’라 한다. 절터의 대지는 가로 60m 세로 39m로 2340㎡이며 중앙에 대웅전 터는 길이 가 45m 가량으로 기단부가 높다. 동측에 옹달샘이 있다. 삼방사지는 벼룩으로 폐사됐다고 전하며, 절터에는 와편과 토기편이 산재해 있다. 1937년경 삼방사 폐사지에 임중이 작은 사찰을 창건하여 3년만에 폐사되어 절의 건물은 북진리 주민이 집을 뜯어갔다. 황석리 선돌【고적】본동의 서쪽에 느티나무거리에 위치했었다. 강을 향한 여성선돌(180×80×25㎝)과 뒤에 남성선돌(139×65×28㎝)은 황석리 초막골 부처바위에서 떼온 것으로 선돌 위를 부처라 한다.현재 황석리 선돌은 충북대학교박물관 교정으로 이전하여 복원하였다. 황석리성치산성(城峙山城)【산성】본동의 자연부락 재구미 뒷산을 ‘성치산성’이라 한다. 산성의 정상부(345.9m)에 석성의 잔존부분이 약 8.4m 남아 있으며 붕괴된 성의 총길이는 약 245m이다. 옛 단돈리 방향(서쪽)의 능선에 흩어진 채 남쪽의 강쪽으로 이어졌다. 특이점은 황석리 방향(동쪽)으로 석성의 흔적이 없는 궁상의 석성이다. 황석리응봉(鷹峰)사지[佛堂谷寺址]【절터】신황석리 마을 뒷산의 응봉(270.8m) 산록(175m)에 소재한다. 동서 장방형의 대지에 남향에 중간 대지는 동서가 50m 남북이 10~15m이다. 황석상리(黃石上里)【마을】조선시대 큰다리목을 중심으로 윗말의 투수골과 초막골을 ‘황석상리’라 하였다. 수몰. 황석하리(黃石下里)【마을】조선시대 큰다리목을 중심으로 아랫말을 ‘黃石下里’라 하였다. 수몰. 후곡(後谷)【마을】本洞의 뒷마을이라 하여 ‘뒷골’이라 한다. 뒷골에서 기와와 옹기를 굽던 자리로 굴뚝이 발견됐다고 전하며, 현재 미침수 지역의 밭에서(150m) 와편과 조선시대 자기 밑바닥 1점을 발견하였다. 마을 수몰. 후곡초로(後谷草路)【길】본동에서 황석들판을 지나 황골로 가는 길로 소꼴과 땔나무를 해오던 길로 후곡초로라 하였다. 수몰.

후산리(後山里)

[후산동, 후산]【리】 본래 청풍군 수하면(水下面)의 지역으로서, 마을 뒤에 큰 산이 있으므로 후산동(後山洞)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후산리라 하여 제천군 수하면에 편입되었다가, 1929년 10월 14일 청풍면에 편입됨. 1980년 4월 1일 제천시 시승격에 따라 시?군이 분리될 무렵 충주댐 수몰에 앞서 행정동리는 제원군 청풍면 황석리에 편입되었가. 1985년 충주댐 수몰 마을로 미침수 지역에 17세대가 새부락을 형성하여. 1991년 1월 1일 행정동리를 법정동리인 후산리(後山里)로 복원되고. 2000년 12월 31일 행정동리 사오리가 후산리에 편입되었다. 곳-집【곳집】 후산리 2반 서낭목 동쪽의 밤나무골에 16인용, 32인용 두 개의 상여를 보관하는 곳집이 있었다. 수몰. 구판장【매점】 마을회관 내에 구판장이 있어 생필품을 저렴하게 공급했다. 수몰. 급수장【수원지】 1984년 마을의 뒷산에서 용천수를 이용한 급수시설을 설치하여 하루 11톤의 용량으로 42명이 급수한다 논-골[沓谷]【골】 마을회관에서 서쪽에 논이 많다고 하여 ‘논골’이라 한다. 수몰. 단무지공장터【터】수몰전에는 단무지용 무를 집단으로 재배하였으며 단무지 공장이 있었음. 단무지저림공장【가공】 황석들 강변의 사질토에 단무지를 재배하였다. 1975년 동민이 융자금으로 30여평의 단무지 저림공장이 있었다. 수몰. 단장골【마을】 후산리 3반으로 14호가 거주했었다. 수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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